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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May 10. 2023

페루 리마 새벽 6시, 에스프레소 보다 짙은 고독

5월 7~9일 실망스러운 69 호수… 트레킹 아니면 와라즈에 오지 마시라

파론 호수에 갔다. 아침 8시 출발해 6시간 산길을 타고 가니 구름을 잔뜩이고 있는 파라마운트 산 앞으로 청록색 호수가 펼쳐졌다.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 사의 로고에 쓰였다고 하는데 그런 산이 하도 많아서 진위여부는 논외로 하겠다. 설산은 가끔 흩어진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 뿐 구름 속에 숨어서 온전한 모습을 낯선 여행객들에게 보이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오른쪽 경사길을 따라 올랐다. 온통 돌길이라 오르기 만만치 않았다. 30분가량 오르니 담수라고 하기에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짙은 청록색 물이 수로를 따라 길게 들어찬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파론 호수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

살칸타이 4박 5일 트레킹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파론 호수는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설산의 가까움이나 무게가 살칸타이 산에 미치지 못했고 호수의 모양과 색은 우만타이 호수를 따라오지 못했다. 비가 간간이 흩날릴 만큼 날이 좋지 않은 탓일까. 다음날 갈 69호수의 예고편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남들보다 훨씬 높이 오르다 아만다를 만났다. 제법 높은 곳에 남미 원주민처럼 생긴 여성 혼자 앉아있었다. 사진 촬영을 요청하니 흔쾌히 웃으며 내 카메라를 받았다. 아만다와 첫 만남이었다. 아만다는 필리핀 어머니와 하와이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외모에서는 동양의 아름다움을 느껴졌지만 말과 행동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금세 친해졌다. 그 뒤로 아만다는 자기 무리로 나를 이끌었다. 

파론 호수 초입에서. 멀리 뒤로 파라마운트 산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다음날 69호수가는 새벽 밴에서 졸고 있는 나를 깨운 건 아만다였다. 아만다는 친구 오드리를 소개했다. 오드리는 남들 다 어렵다고 하는 69호수를 슬리퍼 신고 나들이 가듯 오를 정도로 강한 체력을 자랑한다. 아만다와 오드리 옆에는 독일 청년 줄리엔과 벨기에 청년 봉수앙이 붙어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미국 독일 벨기에 4개국 연합체가 결성됐다. 다국적 연합체는 함께 69호수에 올랐다. 아침식사도 함께 했다. 오르다 무지개를 만나면 사진 찍고 내려오다 방목하는 소들을 만나면 함께 놀았다. 나와 달리 한국인 여행객 3명은 일부러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외국인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다가가지는 않았다. 한국인들과 함께 움직이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숙소 예약, 교통편, 투어 예약, 짐 챙기기, 정서적 안정 등 여러가지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보니 다른 외국인과 어울릴 필요가 없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끼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달랐다. 이번 한국인 동행들과는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다. 나이 차인지 성격 탓인지 모르겠으나 관계가 불편해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한국인 무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69호수 가는 길 뜬 무지개

다국적연합체 멤버는 트레킹 베테랑들이라 아주 빨랐다. 내가 뒤쳐질 정도다. 조금 뒤처지니 한국에서 반년 간 경영학을 공부한 네덜란드 여성 요깅과 중국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로 입양된 앤을 만날 수 있었다. 앤을 처음 봤을 때 한국인 아닌가 싶었다. 너무 예쁜 앤에 한눈에 반했다. 바로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뒤 함께 걸었다. 내가 앤에게 빠진 걸 알고 아만다가 일부러 뒤로 처지는 나를 웃으면서 모른 척해주었다. 친구 요깅과 달리 한국에 온 적 없다는 앤을 한국에 초청했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왓츠앱 계정과 이메일도 건넸다. 여행에서 이런 만남이 좋다. 앤이 오지 않을 수 있지만 혹시나 올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감이 때로는 작은 셀렘으로 가슴 한 귀퉁이에 남는다. 

와라즈에서 만난 아만다

트레킹 코스가 해발 4000m를 넘다 보니 힘들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69호수에 너무 쉽게 올랐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4000m만 넘으면 괴롭히던 고산병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몸이 고산에 적응하고 있는가 싶다. 과테말라 활화산의 아카테낭고 트레킹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활화산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고도 5000m 넘는 산악지대를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니 포기한 곳이었다. 고산병 증세만 없으면 오르는 건 어렵지 않다. 한 달 사이에 북한산과 북악산 코스를 모두 오르내릴 정도로 산에서 기동력과 체력은 자신 있었다. 5월 중반 멕시코로 넘어갔다가 과테말라로 넘어오는 일정이 있으므로 시간 되면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69호수에 함께 오른 다국적 연합체 

막상 69호수에 오르니 실망스러웠다. 우만타이 호수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산세와 모양새는 한참 모자랐다. 해가 나지 않아 물 색이 별로라서 그런가. 산사태로 쏟아져 내린 호수 벽이 보기 흉했고 구름에 숨은 설산도 압도적이지 않았다. 남미에서 보았던 어느 설산보다도 초라했다. 이거 보려고 리마에서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온다는 여행객이 많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와라즈에서 3박 4일 이상 트레킹하기 위해 오는 것 아니라면 와라즈를 건너뛰어도 좋다. 대신 쿠스코에서 3박 4일 살칸타이 트레킹을 권하고 싶다. 트레킹 코스의 아름다움이나 설산, 호수, 평원 모든 면에서 69호수를 압도한다. 

내가 무지개 닮은 미소를 갖고 있구나. 

69호수를 보고 나니 더 이상 와라즈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정이 가지 않은 마을이다. 밤 버스를 타고 바로 리마로 내려왔다. 10시간가량 룰러코스터를 타듯 비몽사몽간에 리마에 새벽 6시 도착했다. 바로 터미널에서 이카 가는 버스를 끊었다. 오전 10시 출발한다. 네 시간가량 남는다. 터미널 건너편 랩솔(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로 아침을 때웠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낯선 곳에 앉아 혼자 여행기를 작성하고 있다. 페루 리마에서 새벽 6시 혼자서 맛없는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있다니 크~ 그냥 좋다. 가끔 여행객의 외로움이 좋을 때도 있다. 지난 며칠 조금 깊어진 사귐 탓에 지쳐있을 때는 낯선 곳에서 홀로 있는 게 반갑다. 지금이 딱 그렇다. ㅎㅎ  

이틀간 산에 함께 오른 미국인 청년 피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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