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철현 Jun 23. 2023

그랑티톤, 옐로우스톤 뒤에 숨겨진 숨겨진 보석

6월20일(화) 비바람 탓에 하루종일 그랑티톤 산과 숨바꼭질

지난밤 그랑티톤 산 바로 밑 롯지에서 묵었다. 목재 2층 침대 4개,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나무 오두막집이다. 매트리스가 없어 나무틀에다 패드를 깔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자야 했다. 동행 셋은 매트리스와 침구가 없는 곳에서는 잘 수 없다고 해 나만 오두막에서 남았다. 오두막에는 피닉스에서 온 피터와 테네시에서 온 채닝이 지난 며칠간 묵고 있었다. 성격 좋은 채닝이 지니 호수를 배 타고 넘은 뒤 그랑티톤 산으로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를 다녀온 무용담을 높은 톤으로 떠들었다. 얼핏 예순은 넘어 보이는 피터는 지난 8일간 오두막에 머물면서 그랑티톤 곳곳을 다니고 있다. 

6월 하순이지만 와이오밍 그랑티톤 지역은 싸늘하다. 새벽에는 손이 굽을 정도로 춥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도 불어 최악이다. 아침식사 준비하면서 만난 여행자는 그랑티톤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귀띔했다. 비는 오늘 오전까지 이어진다는 일기 예보가 있지만 다행히 밤새 내리던 비가 아침에 비가 그쳤다. 아직 구름 속에 숨어 있지만 한떼의 구름이 지나고 다음 구름이 몰려오기 전 짧은 순간이나마 그랑티톤 산은 멋진 자태를 뽐냈다. 산새는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아침 식탁에 앉은 여행객들도 산새 소리와 불협화음을 내는 소리로 서로의 여행담을 주고받는다. 

비는 오고 갔다 다시 왔다. 비가 잦으면 그랑티톤의 절경을 짧은 순간이나마 볼 수 있었다. 지니 호수 전망대에서는 호수 넘어 솟은 그랑티톤의 산세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검은 산 줄기 사이 계곡에 쌓인 눈이 산의 검정과 대조를 이루며 얼핏 얼룩말 무늬처럼 보이고 산자락에는 짙은 침엽수림이 풍성해 푸르고 그 앞으로 짙은 심연의 호수가 펼쳐진다. 날이 맑으면 산이 호수에 비추며 절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날이 궂어 칙칙했지만 산 숲 호수가 어울리는 경치는 멋지다 아니할 수 없었다. 

차를 몰고 구름 위까지 올랐다. 고지에서 내려다본 그랑티톤 평원은 옐로우스톤 못지않았다. 옐로우스톤이 웅장하고 방대하다면 그랑티톤은 오밀조밀하지만 꽉 차있었다. 구룸을 이고 있는 설산이 멀리서 병풍처럼 두르고 그 앞에서 흉터처럼 얽힌 모양새의 강이 넓어져 호수처럼 평원에 머물다 흐르고 초지가 깔아놓은 바탕 위에 짙은 색 침엽수림들이 숲을 이루며 조경수처럼 평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내려다본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구름이 안개처럼 깔리면서 평원은 구름 뒤에 숨었다. 

그랑티톤 산은 하루종일 숨바꼭질을 했다. 비가 거세지면 경치를 보기를 포기하려면 느닷없이 비가 그치면서 산이 드러나고 차까지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면 다시 구름이 다가와 가린다. 결국 더 보기를 포기하고 그랑티톤 산자락에 자리한 내 오두막이 숙소에 체크인하려고 알파인클럽 롯지로 향하자 그랑티톤 산이 선명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동행 셋은 1시간 30분 떨어진 곳에 잡은 숙소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났다. 나야 산 밑에서 자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랑티톤 산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아침식사 시간까지는 산은 여전히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오전 8시 전날 레인저가 최고의 하이킹 코스라고 추천한 트레일을 걸었다. 그랑티톤을 다녀간 여행객마다 그랑티톤은 옐로우스톤이라는 성찬을 완성할 아주 맛있는 디저트라고 강력 추천하는 곳이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로스앤젤레스 그리피스에서 산 후드티가 젖을 정도로 비가 내렸다. 오두막 사무실에 들러 침낭을 기부하고 우비를 얻을 수 있었다. 가방 메고 카메라를 든 채 판초 우비를 뒤집어썼다. 이슬비가 흩날리는 정도라 뒤집어쓰는 일회용 우비는 안성맞춤이었다. 레인저가 알려준 트레일을 찾아 오두막 뒤로 펼쳐진 평원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곰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경계를 늦추지 않고 깊지 않은 숲 속으로 들어가니 오솔길 같은 트레일을 찾을 수 있었다. 밤새 비로 불어난 골짜기 계곡물이 경쾌하는 흘러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타가트 호수를 찾아 걸었다. 

30분쯤 오르막길을 오르자 숲 속에 숨은 타가트 호수에 닿았다. 호수는 거울처럼 그랑티톤 산을 비추고 있었다. 수면과 산이 맞닿는 곳을 경계로 산이 물 위에 펼쳐졌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산은 여전히 구름을 이고 있었지만 호수는 구름마저 비쳐 비현실의 절경을 연출했다. 주위는 적막했고 산은 물 위에 내려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호수는 나무에 가려져 제 모습 다 보이지 않았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물가 바위에 올랐다. 산과 빙하, 짙은 숲, 호수가 어우러져 그랑티톤 최고의 절경을 만들어냈다. 한참 넋 놓고 보다 다른 여행객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타가트 호수 위에 있는 브래들리 호수를 향해 떠났다. 밸리 트레일을 따라 한참 계곡을 올라가니 타가트 호수보다 작은 브래들리 호수가 숲에 숨어서 지나는 여행객에게 자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숙소로 돌어가려면 이제 남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어야 했다. 열심히 걸었지만 일행과 약속시간에 숙소까지 가지 못할 듯했다. 트레일에서 벗어나 초지를 가로질러 가까운 민가로 갔다. 4인 가족이 사는 집에 들러 사정을 말하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해 인터넷에 접속했다. 동행들에게 내 좌표를 알려주고 픽업해 달라고 요청했다. 벌써 약속시간이 지났는데 답변이 없었다. 보이스톡을 해도 답변이 없었다. 동행 셋이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쩔 수 없이 라이언에게 4마일 떨어진 약속 장소로 태워달라고 요청했다. 사례를 하겠다고 말하며 정중히 부탁했다. 라이언은 사례 필요 없다면 흔쾌히 자기 차로 약속 장소까지 태워주었다. 미국도 시골인심은 후했다. 그랑티톤에서 곰 봤냐고 물어보고 한국에는 한번 가보지 못했다며 어떤 나라냐고 궁금해하는 순박한 시골 남자와 나눈 대화의 시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