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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Oct 19. 2017

미드가르드 하늘에 빛나는 무스펠의 불꽃들

햇살이 눈부셔 찬란하고 햇살이 부족해 신비로운 북유럽의 하늘

북유럽 햇살은 부르카를 쓴 이슬람 여인처럼 옅은 구름의 베일을 쓰고 숨어있기 일쑤다. 그러다 느닷없이 눈부시게 밝은 빛을 쏟아붓는가 싶더니 이내 구름 뒤에 다시 숨는다. 태양의 신 발드르가 드물게 조증이라도 걸려 햇살이 제법 쏟아지는 날이면 도심 공원과 카페는 볕바라기 하는 나온 이들로 넘쳐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다.


9월 중순 햇살 밝은 날 덴마크 코펜하겐 스트뢰에 거리. 이틀 내내 낮은 구름이 해를 가려 우중충하고 스산하더니 사흘 만에 햇살이 기분 좋게 쏟아졌다. 시민들은 일찌감치 노천카페나 공원으로 몰려나와 햇볕 잘 드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얀 패딩까지 껴입은 은발의 할머니는 햇볕에 겨워 곁잠을 자고 옆에는 가죽 재킷에 스카프까지 두른 멋쟁이 중년 남자가 금발로 머리를 물들인 연인과 데이트를 즐긴다. 혼자 온 이들은 햇살을 만끽하며 예외 없이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

햇살 좋은 날이면 코펜하겐 시민들이  스트뢰에 거리 내 카페나 공원에 나와 볕바라기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코펜하겐 운하를 오가는 투어 보트가 출발하고 돌아오는 니하운 선착장에서 스코틀랜드 노부부를 만났다. 노부부는 가느다랗게 뜬 두 눈에 햇살을 가득 품고 한국서 온 여행객을 넉넉하게 쳐다보았다. 남편 월터는 "코펜하겐에서 일하는 아들을 보러 자주 와. 오늘처럼 좋은 날은 드물어. 보트 투어를 마치고 벤치에 앉아 볕바라기 하고 있네"라고 말했다.     


쾨벤하운과 크리스티아니 섬 사이를 흐르는 바닷물이 해안선을 깊이 파고 들어가 구불구불한 운하를 만들었다. 운하는 해안 따라 흩어져 자리 잡고 있는 주요 관광지를 잇는다. 보트 타고 한 시간 남짓 돌면 크리스티안보르 궁전부터 프레드릭 교회, 오페라하우스, 왕립극장, 왕립도서관, 인어공주 동상까지 명소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다. 니하운을 떠난 보트가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동쪽 경계까지 나아가면 발트해가 눈에 들어온다.


코펜하겐 운하의 가을은 멋지다. 수면을 훑고 운하까지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날 세운 낫처럼 차갑고 예리하지만 햇볕에 닿으면 이내 무뎌져 선선한 느낌으로 바뀐다. 니하운 운하 양쪽에는 돛을 펴 올리고 내리는 기둥과 로프가 고풍스럽게 얽혀 있는 요트들이 잇대어 정박하고 있다. 빨갛고 노랗고 오렌지색 집들이 운하를 따라 줄지어 섰고 그 앞 식당가에선 관광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식과 술을 즐긴다. 그러다 볕이라도 좋으면 식당들은 현지인이 차지한다. 외지인에게 친절한 코펜하겐 시민이지만 햇볕만큼은 이방인에게 뺏기고 싶지 않은 듯하다.

코펜하겐 니하운 운하 옆으로 정박한 배들이 고풍스럽다.

코펜하겐 시민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햇살을 즐긴다. 카페나 공원에 앉아 볕바라기 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뛴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햇살 닿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햇살을 맞고 있으면 찌뿌둥한 날씨 탓에  마음속에 스민 습기가 보송보송하게 말라간다.


강 건너 히피의 해방구 크리스티아니로 들어가면 히피와 관광객이 호수 공원에 자리 잡고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을 해시시와 함께 흡입한다. 대마초를 농축한 마약, 해시시에 취한 것인지 햇살에 풀어진 것인지 히피들은 호수 주변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다. 북유럽 체류 스무레만에 난 유난히도 눈부신 북유럽 햇살에 중독되고 말았다.   


노르웨이 제2도시 베르겐에서 햇살은 코펜하겐보다 빛났다. 베르겐은 피오르 관광 종착지다 보니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9월 중순 어느 날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자 시내 곳곳에 자리한 공원마다 인파들로 넘쳐났다. 시내 한가운데 릴르 룽게가르즈반 호수 공원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주중이라 출근했을 터인데 어디서 그런 인파가 쏟아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은 세공품을 파는 가게 주인은 “이리 햇살이 밝은 날은 아주 드물다. 햇살 가득한 베르겐을 보다니 당신은 운이 좋다”라고 말했다. 행운을 만끽하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고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내려본 베르겐 시내는 햇살을 튕겨내며 빛났고 바다는 푸른 하늘을 담은 채 수평선까지 뻗었다. 오슬로 역부터 피오르 관광 일정을 함께 다닌 이민주 씨는 "피오르 관광 내내 해가 없어 어둡고 칙칙해 우울했는데 밝게 빛나는 베르겐을 보니 상쾌해졌다. 노르웨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다"라고 말했다.    

태양의 신 발드르


스웨덴 스톡홀름에선 도착한 날부터 햇살이 반겼다. 스톡홀름 구시가인 감라스탄 거리에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어울려 빛의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도 헬싱키 일정 내내 우중충한 날씨 탓에 심해졌던 외로움의 감정을 말렸다. 감라스탄 펍에 들러 맥주 한 병 곁들이자 정취는 절정을 이뤘다. 체류 내내 날씨가 좋아 스톡홀름은 내게 빛의 도시로 기억될 정도다.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한다.


노르웨이 오슬로 토르 항구 부근 해안. 햇살이 잠깐 비추자 여성 2명이 내 눈앞에서 옷을 벗더니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난 추워서 패딩까지 입고 있었는데. 이러니 북유럽 햇살을 좋아할 수밖에.


나라마다 특히 좋아하는 신들이 다르다.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번개와 농업의 신 토르를 좋아하고 덴마크 노르만족은 최고 신 오딘을 숭배한다. 그럼에도 북유럽인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신은 태양의 신 발드르다. 남신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얼굴은 바로 보기 어려울 만큼 빛났고 머릿결은 윤이 났으며 피부는 백옥 같았다.


발드르가 요절한다는 참언이 나오자 아버지 오딘과 어머니 프리그뿐만 아니라 아스가르드에 사는 거의 모든 신들이 그의 예고된 죽음을 막기 위해 나섰다. 그럼에도 그가 죽자 신들은 지옥 헬까지 가서 그를 부활시키려 했다. 북유럽인들은 생각 없는 음유시인이 덧붙인 발드르의 죽음을 묵인할 수도 하늘에 해가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나 보다.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 오딘, 토르, 로키 등 거의 모든 신들이 죽지만 발드르는 폐허 속에서 부활해 새 시대를 연다.


북유럽 신화에는 해와 달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다. 해와 달은 스킨팍시(빛나는 갈기)와 흐림팍시(서리에 덮인 갈기)라는 2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실려 빠르게 하늘 길을 따라 움직인다. 거대 늑대 펜니르가 해와 달을 잡아먹으려 쫓아오다 보니 궤도를 따라 도망 다니는 처지다. 이로 인해 세상에 낮과 밤이 생겼다고 한다. 해가 숨으면 밤이고 해가 나오면 낮이다. 그러니 늑대 펜니르는 밤에만 돌아다닐게다. 멀리 보이는 빛을 뒤쫓으며. 또 오딘과 그 형제들이 초거대 거인 이미르를 죽인 뒤 그 두개골로 하늘을 덮자 남쪽 불의 나라 무스펠에서 날아온 불꽃이 해와 달, 별이 되었다는 신화도 전해지고 있다.

바이킹족은 10세기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부터 북으로는 라플란드, 서쪽으로 아일랜드 더블린과 그린란드, 남쪽으로는 프랑스 노르망디, 동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쳐들어가 점령했다. 당시 항해에 나선 바이킹 전함마다 항해 보조도구로 태양의 방향을 알려주는 ‘태양석(Sun Stone)’을 실었다. 북유럽이나 북극 인근 바다에는 안개, 비, 구름이 해와 별자리를 가렸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나오는 섬광석(閃光石)으로 만든 태양석을 이용해 태양의 방향을 알아냈다고 한다. 섬광석은 빛에 민감해 태양이 있는 쪽으로 향하면 색깔이 바뀐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별자리와 관련한 내용이 거의 없다. 토르가 거인 티아치를 죽이고 두 눈을 빼 하늘에 던져 쌍둥이별을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정도다. 구름이 짙게 하늘을 덮다 보니 별자리를 자주 접하지 못한 탓일 게다. 북유럽 3개국 여행 기간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페리를 타고 스톡홀름을 건너올 때도 하늘에 밝은 별 2~3개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차고 넘치는 별자리 관련 신화를 북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하늘의 푸름과 그 푸름을 닮은 호수는 신비로움을 뽐낸다. 햇살이 구름 뒤에서 비추다 보니 구름이 옅으면 빛은 구름 결을 따라 천상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하늘에 잇닿은 호수면은 그 하늘을 담는다. 노을의 색은 진하고 선명해 물에 풀어진 잉크처럼 퍼진 구름과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석양이 질 때면 주황과 빨강이 회색에 섞여 하늘을 덮으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정물화가 하늘에 펼쳐진다.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마다 멋있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사진 촬영을 일도 배우지 않은 내가 아이폰으로 대충 찍은 풍경들이다. 카메라만 대면 그림이 되는 곳. 그만큼 북유럽의 하늘은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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