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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Oct 26. 2017

신화 속 여신들에게서 엿보는 북유럽의 미

금발, 푸른 눈, 창백한 피부에 까칠한 성격까지 두루 갖춘 북유럽 미인들


나는 이성애자(heterosexual)다. 맞다. 커밍아웃이다. 동성애자만 커밍아웃하라는 법 없지 않나. 물론 내 커밍아웃은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정면으로 맞서고 감내할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성애자고 남자다 보니 남자보다는 여자에 관심이 많다. 특히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내 호기심은 유별나다. 길을 걷다 미인을 보면 넋을 잃고 쳐다보기 일쑤다. 여행 중 미인과 마주치면 적극적으로 다가가 묻는다. 뭘 묻냐고? 그냥 아무거나. 아이스 브레이킹(ice-breaking)에 유용한 시답지 않은 주제 말이다.   


아를다운 얼굴, 균형 잡힌 몸매, 고결한 품성, 탁월한 지성 등등. 미인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다. 남자의 인지구조상 여성의 얼굴과 몸매를 먼저 보게 된다. 품성이나 지성은 상당 시간 대화하고 겪어봐야 알 수 있지 않나. 외모에 대한 호불호는 보자마자 갈린다. 그다음에 대화를 나누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천재 경제학자 존 내쉬(러셀 크로우 역)가 클럽에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 “체액을 주고받자”는 어이없는 제안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존 내쉬는 그 제안을 건넨 뒤 상대로부터 물세례를 받았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성차별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가부장적 권위 체계가 지배적인 사회를 좋아라 하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남성 집권의 사회구조를 혐오한다. 무의식 속에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반박할 여지가 없다. 내 무의식 중에 잠재한 편견과 오류가 어디 한두 가지겠나. 지난 50년간 이 땅의 아저씨로 성장하면서 남성 우위 사회관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학습했으니 여성성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주제가 조심스러워 들어가는 말이 길고 번거로웠다. 이번 편에선 북유럽 신화 속 아름다운 여신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북유럽 여행 도중에 만난 노르만족 미인들과 있었던 사소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고자 한다. 또 노르만족이 지닌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공유하고 그 숭배 행위를 엿보고자 한다. 혹시 여성성에 대한 편견이나 오류가 드러나면 심하게 나무라지 않길 바란다. 낮은 목소리로 지적하면 편견은 버리고 오류는 바로 잡겠다. 

북유럽 신화 속 미의 여신은 프레이야다. 신, 거인, 요정 가리지 않고 남성이라면 프레이야와 잠자리를 꿈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 백옥 같은 피부, 균형 잡힌 몸매에 까칠한 성격까지 남성이 좋아 죽는 요소는 다 갖췄다.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 눈에서 황금이 흘러나온단다. 


프레이야는 바니르 족이다. 반면 오닌, 토르 등 북유럽 주신들은 에시르 족이다. 에시르와 바니르 족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고 화해했다. 갈등을 봉합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프레이와 프레이야 남매 등 바니르 족 일부가 신의 땅 아스가르드에서 에시르 족과 함께 산다. 두 신족의 평화를 위해 볼모로 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프레이야는 난잡하다. 남편 오드르가 오랜 여행에 떠나자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신들의 말썽쟁이 로키가 프레이야가 거의 모든 에시르 신들과 잔다고 비난할 정도다. 여러 엘프 족과도 사랑을 나눈다. 심지어 친오빠 프레이와 섹스하다 현장에서 신들에게 발각된 적도 있다. 섹스의 여신이라 불릴만하다. 


미의 여신은 권력, 보물, 숭배 등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미모를 한껏 이용한다. 14세기 북유럽 신화에서 프레이야는 최고 권력자 오딘의 정부로 나온다. 프레이야는 잠자리에서도 차고 자는 금 목걸이 브리싱가를 얻기 위해 난쟁이들에게 몸을 팔기도 한다. 


프레이야는 어느 날 난쟁이 마을을 지나가다 난쟁이 4명이 아름다운 금 목걸이를 주조하는 장면을 본다. 프레이야는 그 금 목걸이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난쟁이들은 프레이야의 미모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프레이야는 난쟁이 4명과 하룻밤씩, 나흘간 난쟁이 마을에서 잔 뒤 브리싱가를 얻는다.   

북유럽 미의 여신 프레이야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여신이다. 

프레이야가 닥치는 대로 아무와 교접하진 않는다. 나름 줏대가 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떤 구애도 냉정하게 거부한다. 거인들이 위기에 처한 아스가드르와 신족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프레이야와 결혼을 내걸지만 프레이야는 이들의 구혼을 단호히 거절한다. 특히 거인 2명이 프레이야의 결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거절당하고 결국 토르의 망치 묠리르에 목숨까지 잃는 에피소들이 전해진다. 


에시르와 바니르 간 전쟁 탓에 아스가르드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어느 날 거인이 말 타고 나타나 6개월 안에 성벽을 재건하는 조건으로 해와 달과 함께 프레이야를 달라고 요구한다. 성벽 보수가 급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 신들은 6개월 만에 성벽을 수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 거인이 6개월간 공사하다 말면 미완성 구간은 자기들이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거인은 괴력의 말 스바딜파리의 도움을 받아 차질 없이 성벽을 수리해나갔다. 이에 프레이야는 난리를 쳤다. 신들은 해와 달을 거인에게 빼앗기는 것도 싫지만 프레이야의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거인과 약속을 파기하고 거인을 죽인다.  


한번은 거인 오거들의 왕 스림이 토르의 망치를 훔친 적 있다. 오거의 왕은 망치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프레이야와 결혼을 요구했다. 토르는 로키를 대동하고 프레이야에게 가서 스림과 결혼할 것을 요청했다. 그 소리를 듣자 프레이야는 “당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내가 오거 따위의 손길과 욕정에 몸을 맡기거라 생각했냐”라며 분노했다. 그 자리에서 황급히 벗어나면서 토르는 “화내니까 정말 예쁘네. 그 오거가 왜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어”라고 말했다. 결국 토르는 프레이야처럼 분장하고 몸종으로 변신한 로키를 데리고 스림에게 가야 했다. 오거의 성에서 토르는 묠리르를 되찾자마자 거인들을 몰살했다. 

프레이야는 늘 남자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북유럽 신화의 슈퍼스타 토르는 에시르 신족 출신 시프와 결혼했다. 토르는 여러 유혹에 빠지지 않고 평생 부인만 사랑했다. 시프는 푸른 눈, 흰 피부, 붉은 입술, 황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카락 등 북유럽 미인이 갖춰야 할 미의 요소를 모두 가졌다. 압권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 보리밭처럼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이다. 


어느 날 로키가 장난 삼아 시프의 머리카락을 다 뽑아가는 바람에 시프는 민머리로 변했다. 토르는 로키를 잡아 치도곤을 냈다. 로키는 스바르탈페임에 사는 난쟁이들에게 부탁해 시프의 머리를 다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목숨을 건졌다. 난쟁이들은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손솜씨가 탁월한 장인들이었다. 난쟁이들이 머리에 착 달라붙는 가발을 만들어 선사하면서 시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을 되찾을 수 있었다. 


프레이야의 오빠 프레이는 거인 세계의 최고 미인 게르드를 사랑했다. 프레이는 잘 생기고 탁월한 전사다. 특히 휘두르지 않아도 알아서 싸우는 강력한 칼을 갖고 있어 백병전에서 천하무적이다. 또 밭을 비옥하게 하고 죽은 땅에서 생명을 낳는 신이라 인간들은 프레이를 숭배했다.  프레이는 어느 날 오딘의 옥좌인 흘리드스캴프에 앉았다. 오딘의 옥자에 앉으면 누구든지 세상 구석구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프레이는 옥좌에 앉아 북쪽 거인의 땅을 바라보다 게르드를 발견하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 

빛의 정령 스키르니르가 거의 세계의 미인 게르드를 만나 프레이의 마음을 전한다.

프레이는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없어. 그녀가 자기 집 문을 열려고 팔을 들어 올리니까 빛이 그 팔을 스치는데, 하늘을 비추고 바다를 밝히는 듯했어. 그녀가 있어 세상이 더 밝고 아름다운 곳이 됐지. 내가 시선을 돌려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으니 내 세상이 어두워지고 절망적이고 텅 빈 곳이 됐어”라고 탄식했다. 게르드의 미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결국 그의 부하이자 빛의 정령 스키르니르가 게르드에게 가서 프레이의 마음을 전하면서 둘은 결혼한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푈리르가 스웨덴을 건국했다고 한다. 


스키르니르는 결혼을 성사시키고 프레이의 혼자 싸우는 칼을 보상으로 받았다.  프레이는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 불을 내뿜는 괴물 수르트와 싸우다 에시르 신족 가운데 가장 먼저 패해 죽는다. 혼자 싸우는 칼이 있었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발키리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초자연적 존재들이다. 전투에서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자들이 가는 발할라에 살며 전사들에게 와인과 꿀술을 따른다. 인간 여성도 방패의 수호자로서 발키리의 삶을 살기도 한다. 많은 남자들이 이 위험한 여전사인 발키리와 결혼하기 위해 그 뒤를 많이 따라다녔나 보다. 최고 신 오딘은 발키리들에게 자기를 따르는 남자 중 원치 않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려면 영웅 중에서 스스로 신랑감을 선택해 결혼할 수 있게 했다.


발키리들은 전쟁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들은 오딘의 명예 따라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 산 자와 죽을 자를 정한다. 브린힐더라는 발키리는 오딘 명을 어기고 잘 생긴 젊은이 지그문드에게 승리를 선언했다. 이에 분노한 오딘은 지그문드를 죽이고 브린힐더를 지그린드와 강제 결혼시켰다. 브린힐더는 원치 않은 남자와 결혼했지만 북유럽 최고의 영웅 지크프리트를 낳는다. 


북유럽인 미인의 요건으로 하얀 피부, 황금색 머리카락, 푸른 눈, 큰 키를 꼽는다. 춥고 황량한 자연환경에서 살면서 진화한 결과다. 또 북유럽 국가들은 소득 수준이 높고 무상교육 시스템을 도입해 품격과 지성을 갖춘 여인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미스 월드 같은 세계 미인 대회에서 북유럽 여성들이 왕관을 쓰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번 여행에서 난 프레이야나 게르드 같은 미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만났냐고? 대한민국 길거리 걷는다고 김희선, 이영애, 김태희를 만나는 건 아니잖나.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4개국을 다녔으나 프레이야나 게르드 같은 여신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발키리 같은 야성미 넘치는 여인은 보지도 못했다.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날 그러니까 코페하겐에서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민박집에서 마지막으로 묵는 밤에 북유럽 미인 2명을 만날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난 도심에서 버스로 20분 이상 떨어진 민박집에 묵었다. 에어비엔비로 간신히 예약한 터라 별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가보니 최악이었다. 집주인은 마귀할범처럼 생긴 러시안 여자다. 밤에 마주칠까 무서웠다. 헤비 스모커라 집안이 담배 연기로 찌들었다. 자기가 새벽 5시에 출근해야 하므로 밤늦게 문을 여닫을 때 소리를 내지 말아달라고 곳곳에 주의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그러다 보니 숙소에는 밤늦게 들어가 아침 늦게 나왔다.


마귀할범 집에서 묵는 마지막 날 일찌감치 나와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밤 11시 넘어 버스를 탔다. 그날따라 버스 안에 설치된 스크린은 정류장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둠이 짙은 터라 바깥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선도에서 16번째 정류장임을 확인하고 버스 정차 횟수를 세다 16번째 정류장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정류장은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어둠이 짙은 탓에 방향을 구분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3시간 전에 방전돼 구글맵도 켤 수 없었다. 자칫 북유럽 추위를 견디며 노숙할 위기에 처했다. 버스 진행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20분 넘게 걷다 보니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불이 켜져 있고 그곳에 여상 2명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길을 건넜다. 그곳에서 잉게와 안나를 만났다. 키는 나보다 컸으니 175cm를 넘었을게다. 잉게는 파란 눈을 가졌다. 머리카락은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로 컬을 이루며 어깨 밑으로 내려왔다. 정성스레 갖춘 티가 역력했다. 안나는 초록색이 살짝 들어간 하늘색 눈을 가졌다. 눈동자 색이 옅어서 신비스러워 보였다. 샛노란 금발은 묶어 말총처럼 땄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다. 난 최악의 상황에서 북유럽 최고의 미인 2명을 만난 것이다. 


게다가 친절하고 착했다. 두 북유럽 미인은 버스 정류장에 붙은 노선도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한참 동안 상의하더니 이번 정류장에 서는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뒤 내리면 숙소를 찾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너무 고마웠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버스가 늦게 왔다. 덕분에 코펜하겐 외곽 버스 정류장에서 난 북유럽 미인 2명과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 한여름 햇살처럼 터지는 웃음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둘은 고등학교 2학년생이다. 잉게가 집에 놀러온 안나를 배웅하다 낯선 여행객을 만난 것이다. 스무살은 넘어보이던데 미성년자라니. 난 그들과의 짧은 데이트의 추억을 기억 한 귀퉁ㅋ이에 갈무리하며 버스에 올랐다. 덴마크 고등학생 2명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을 따라 내 마음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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