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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Nov 02. 2017

기독교 탄압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쫓겨난 오딘과 토르

노르만족, 종교와 함께 신들의 이야기를 버리다

9월 햇살 좋은 날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감라스탄에 들어갔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감라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을 관광객들과 섞여서 걷다 보면 스웨덴 국회의사당 넘어 뾰족한 초록색 첨탑이 눈에 들어온다. 1279년 세워진 스톡홀름 대성당이다. 감라스탄이 13~17세기 걸쳐 지어진 옛 건물들로 가득한 곳이긴 하나 대성당은 특히 고풍스러운 자태를 자랑한다.


대성당은 감라스탄의 중심에 위치해 스톡홀름 시민의 종교적 구심처로 기능한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루터파 교회치고는 상당히 호화롭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출입구를 지나 홀에 들어서면 금박과 은괴로 치장한 구조물들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은은한 빛을 발한다. 이곳에는 루터파 교회의 엄숙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작품이 있다. 제단을 바라보고 왼쪽에 철갑 옷을 입은 중세 기사가 말을 타고 용을 죽이는 모습의 동상이 서있다. ‘성 조지와 용’의 상이다.

스톡홀름 대성당 안에는 '성 조지와 용'의 동상이 어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청동상은 북유럽 신화나 사가(Saga)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기독교 성인 조지가 마을 처녀를 공물로 요구하는 사악한 용과 싸워 마을 사람을 용의 핍박에서 구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기독교 성인인 것만 빼고는 ‘뵐숭 그 일족의 사가(saga)’에 나오는 시구르드 이야기와 비슷하다. 북유럽 신화가 중세 기독교 신앙과 변태적으로 결합해 기독교도 아니고 북유럽 사가도 아닌 이상한 종교적 설화로 둔갑한 듯하다.


원작 격인 사가에선 북유럽 최고의 신 오딘과 인간 여성 사이에 낳은 반인반신 가문의 후손 시구르드(독일어명 지크프리트)가 사악한 용과 싸워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차지한다.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 북유럽인 들은 오딘이나 그의 전령 발키리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들을 문자의 기록에서 솎아냈다. 또 시구르드라는 반인반신의 주인공은 기독교의 성인으로 대체한다.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가 다른 신성을 인정할 수 없는 탓이다.

사진가 에피 비크스트롬이 촬영한 석양의 감라스탄

‘성 조지와 용’의 동상은 기독교가 북유럽 신화에 저지른 만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는 이단의 북유럽 신화를 용인하지 않았다. 오딘, 토르, 프레야 등 북유럽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문자의 기록과 일상에서 쫓아냈다. 북유럽 신들은 왕이나 영웅처럼 인간으로 격을 낮춰야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 이 탓에 전해지지 않은 북유럽 신화가 아주 많다.


이야기가 없이 이름만 남은 신들도 수두룩하다. 이름과 함께 자질과 능력은 전해지지만 관련 신화가 없다. 신들의 의사 에이르, 결혼의 여신 로픈, 사랑의 여신 쇼픈, 지혜의 여신 보르는 사라지거나 묻혔다. 또 종교적 검열이 미처 닿지 않은 민간 설화나 시, 산문 등 형태로 신화의 일부가 전해진다. 대표 사례가 ‘프레이야의 눈물’이라는 시적 표현이다. 북유럽 미의 여신 프레이야는 금을 눈물로 흘렸다다고 한다.


앵글로색슨 교회는 기독교 신앙이 들어오기 전의 신들의 이야기를 보존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유일신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부 영웅의 스토리는 살아남았다. 북유럽 신화 속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베어울프(Beowolf)가 고대 영어로, 니벨룽겐의 반지(Nibelungenlied)가 독일어로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북유럽 신화를 지켜온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쫓겨나 아이슬란드로 넘어간 망명자 집단이었다. 9세기 초까지 아이슬란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빛나는 머릿결로 유명한 하랄드 왕이 870년대 노르웨이를 통일하면서 그의 압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4백여 가구가 아이슬란드로 건너왔다.


이곳에서 북유럽의 신화를 담은 에다(Edda)와 사가가 살아남았다. 특히 12세기 아이슬란드에 르네상스가 찾아오면서 에다와 사가가 많이 지어졌다. 에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신화와 영웅 전설을 시로 만든 것이다. 사가는 식민지에서 삶, 바이킹 활동, 왕족 간 싸움 등을 시대에 따라 묶은 산문이다.


북유럽 신화 보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는 12~13세기 아이슬란드에 태어나고 죽은 시인이자 역사학자 스노리 스툴루손이다. 그는 고대 언어로 쓰인 ‘운문 에다(Poetic Edda)’를 산문으로 풀어낸 ‘산문 에다(Prose Edda)’를 남겼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북유럽 신화들은 에다라는 형식을 빌어 기록돼 북해에 떠 있는 춥고 외로운 섬 아이슬란드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오딘과 토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추방돼 망명지 아이슬란드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스툴루손마저도 오딘과 그 부인 프리기다를 신이 아니라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격을 낮췄다. 오딘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의 후예로 그의 무리를 데리고 터키에서 북유럽 땅으로 넘어온 이민자 집단의 우두머리로 묘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성을 빼앗긴 덕에 오딘을 비롯해 북유럽 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보다 늦게 기독교로 개종했다. 스톡홀름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곳에 스웨덴의 옛 수도 웁살라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 웁살라대학이 이곳에 있다. 스웨덴 중동부에 있는 옛 수도의 정치, 행정, 사법, 종교 활동의 중심지는 웁살라 사원이다. 브레멘의 아담이라 불리는 학자가 1070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웁살라 사원에 오딘, 토르, 프레이 등 북유럽 신들이 동상이 있었다. 토르가 가운데 섰고 오딘과 프레이를 좌우에 배치했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의 유적이나 유물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떨어진 도서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다.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 발트해에 떠 잇는 고틀랜드나 아일오브맨처럼 바이킹이 점령한 섬들에서 북유럽 신화와 설화를 담은 돌조각이나 기록이 발굴됐다. 고틀란드에는 475개 돌에 새긴 그림이 남아있는데 그 돌 그림 속에 8개 발을 가진 말 스레이프르를 타고 다니는 오딘이 새겨져 있다. 또 토르가 소머리를 미끼로 써 인간의 세상 미디가르드를 감싸고 있는 뱀 요르문간드를 낚시로 끌어올리는 장면도 있다. 반인반신 시구르드 이야기는 바이킹이 지배했던 러시아 볼가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나오는 유물 유적은 북유럽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기 전에 만들어진 것 위주로 일부 전해지고 있다. 스웨덴 람순트에서 발견된 석상에 시구르드 이야기가 새겨져 있고 덴마크 레에레 지방에선 오딘의 형상화한 자그마한 철제 작품이 발견됐다.


스웨덴은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면서 북유럽 신화를 애써 잊었다. 스톡홀름 북부에 오덴플란 역, 토르스가탄, 발할라베겐 등 북유럽 신화에서 모티프를 딴 지명이 남아있을 뿐 예술이나 문학 작품에서 북유럽 신화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스톡홀름 곳곳에는 기독교 성인의 동상이 즐비하다. 왕궁 안팎엔 기독교를 이단 종교에서 구한 왕과 성인들 동상뿐이다. 오딘이나 토르의 동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언맨, 헐크, 캡틴아메리카 등 영화 <어벤저스> 속 멤버들 옆에 서 있는 장난감 토르 피겨 인형이 스톡홀름 중앙역 부근 장난감 가게 창문 너머로 어색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북유럽 신화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 기뻤다. 피오르 항구에 접한 오슬로 시청사 양쪽 회랑 벽에는 북유럽 신화의 에피소드들이 새겨진 목조 판화 작품 16개가 줄지어 붙어있다. 노르웨이 조각가 다그핀 베렌스코이드의 작품이다. 시청사 그랜드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이그드라실 석조 부조도 그의 작품이다. 판화 작품마다 노르웨이어와 영어로 신화에 대한 설명이 깨알같이 적혀 있어 북유럽 신화 문외한도 작품에 담긴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청사 뒷문에 연한 오슬로 항구의 공식 명칭도 ‘토르스하운(토르의 항구)’다. 토르 항구에는 오슬로 피오르에 떠 있는 섬을 오가는 페리나 새벽에 바다로 나가 대구나 새우를 잡고 들어오는 어선들로 분주하다. 이곳에선 오슬로 시청이 주관하는 갖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해 늘 시민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룬다. 그 옆에는 디즈니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아렌델 왕국이 모티프가 된 아케르스후스 요새가 항구를 내려보고 있다.

노르웨이 조각가 다그니 베레스코이드가 세계수 이그드라실을 조각한 부조 작품이 오슬로 시청사 그랜드홀에 붙어있다.

오슬로에서는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 묵었다. 노르웨이 왕궁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은 숙소의 이름은 발할라였다. 북유럽 신화에서 발할라는 전쟁터에서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이들이 가는 사후세계로 일종의 천국이다. 별 볼일 없이 살다 죽은 이들은 지옥의 여신 헬이 지배하고 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나는 발할라 숙소에서 프레이 방에 묵었다. 스톡홀름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던 북유럽의 신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어 반가웠다.


신화나 종교적 설화는 사람들 의식 속에 집합적으로 저장돼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세대를 잇대 전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묶인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라오스 루아프라방 사원에 있는 조각상마다 깃든 종교적 설화를 접하며 “고유한 ‘이야기 성(性)’이 세계 인식의 틀로 기능하게 하는 것도 종교의 기본 역할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야기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북유럽인들이 기독교 유일신을 믿느라 자기 종교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이야기마저 잃을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낭만주의 시대를 맞아 민족 종교나 신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북유럽 신화는 재조명됐고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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