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만난 아름다운 소녀의 이미지
7월 15일(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구선수는 오타니 쇼헤이 LA에인절스 투수 겸 타자다. 쇼헤이는 일본 프로야구 시절부터 괴물이라 불리며 투수와 타자를 겸했다. 투구는 시속 160km를 가볍게 넘기고 두자릿수 홈런을 쳤다. 지난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개막전 한국팀과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6이닝을 2피 안타 무실점 10 탈삼진 괴력투로 한국에 패배를 안겼다. 키 193cm에서 꽂아되는 165km 넘나드는 강속수에다 홈런 타자이기도 하다 보니 미국 메이저리그 데뷔 원년 오타니 쇼헤이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아주 미남이다. 이런 제길.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 뛰었던 닛폰햄 파이터스가 홋카이도를 연고로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홋카이도 곳곳에 오타니 입간판이 널려있다. 하코테다도 예외는 아니다. JR 역부터 오타니 입간판이 관광객을 반긴다. 10여 년 전 뉴욕 맨해튼에서 빌딩 한쪽 벽면을 입간판으로 장식한 뉴욕 양키스 캡틴이자 유격수 데릭 지터에 다를 바 없다.
암튼 오타니 안내를 받으며 하코다테 명물 트램을 타고 주지가이로 향했다. 인근 모토마치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1860년대 일본 개항기 유럽 문물과 일본 문화가 섞이면서 독특한 건축 양식을 100년 이상 간직한 곳이다. 일본은 고집스럽게 100년 넘은 목조건물을 지켜내고 있었다. 전통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은 상상 이상이다. 건축물이 지닌 기능보다 미학과 전통을 중시힌다. 불편하더라도 아름답고 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감수한다.
1860년대 미국 흑선이 강제로 열어버린 일본의 속살에다 강압적으로 이식된 서구 문명이 변태적으로 뒤섞이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한 문물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 하코다테다. 하코반자카에서 바다를 보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언덕을 뛰어 내려와 내게 닥칠 것 같고 이미 떠나 이기리스 함대 장교에 마음을 뺏긴 메이지유신 초기 하코다테 여인의 눈물이 떠오른다.
모토마치 고엔에서 100년 이상 고집스럽게 간직한 하코다테의 개항 초기 시간여행을 마치고 트램을 타고 20분가량 덜컹거리며 나아가다 고료가쿠고엔마에에서 내렸다. 20분가량 이어진 트램에서 하코다테 최고의 순간을 선사한 소녀 사키를 만났다. 하코다테 태양에 자연스럽게 그을린 건강한 얼굴색을 화장기 없이 그대로 드러낸 소녀에게서 하코다테의 순수를 발견한 듯했다.
사키는 영어를 잘했다. 근데 자기가 예쁘다는 걸 몰랐다. 아니 모른 척한 건가. 주지가이에서 고료가쿠고엔마에까지 가는 시간이 행복했다. 벚꽃처럼 터지는 웃음과 낯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은 무리한 일정에 지친 여행객을 행복하게 했다. 아쉽지만 고료가쿠로 발길을 돌리면서 사키와 헤어졌다. ㅠㅠ
고료가쿠타워에서 내려다본 고료카쿠는 완전한 별이다. 별 모양으로 해자를 파서 별 외곽선을 따라 물이 흐르게 하고 별 안에는 지방 행정청과 나무들로 채워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1860년대 완성했다고 한다. 서양 성곽을 연구한 뒤 새 요새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당시 홋카이도 지방관료의 발상에서 7년간 공사가 비롯됐다. 100m 이상 높이에서 내려다본 고료카쿠는 완벽한 별이었다. 그것도 물과 나무와 건축물로 이루어진 완벽한 조형물이었다. 1860년대 일본인이 가진 미학에 감탄할 따름이다.
아쉬운 건 기능이다. 요새라고 하지만 성곽의 높이는 너무 낮고 해자는 고작 10m에 미치지 못해 경무장한 군인이라면 능히 헤엄쳐 건널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도쿠가와 막부 패잔병이 들이닥쳤는데 방어하지 못하고 함락당하고 만다. 실용보다 미학에 천착한 일본인의 심성을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양을 중시하다 한국과 중국 바둑에 철저하게 밟히는 일본 바둑 같다고 할까.
별을 떠나 유노가와 온천으로 향했다. 그곳 호텔이나 료칸에 묵는 이들에게나 허락되는 온천을 찾아 돌아다니다 가이드북이 소개한 타쿠보쿠데이 호텔 11층에 있는 온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도보 여행객에 달라붙은 피로와 떼를 씻어냈다. 호텔서 나오자마자 주지가이로 서둘러 돌아왔다. 세계 3대 야경이라는 장관을 보기 위해서다.
주지가이 근처 키쿠요식당에서 해산물 덮밥을 먹었다. 홋카이도 특산 쌀 유메파라카에 성게알, 연어알, 게살을 얹은 해산물덮밥은 비린내는 없는데 바다 맛은 고스란히 담았다. 게살과 밥이 섞여 입안에 들어왔을때 성게알의 비릿한 덥덥함을 감지할 때쯤 때맞춰 연어알이 터지면서 간을 맞춘다. 아직 맛보지 못한 맛이다. 하코다테를 떠올리면 이제 이 덮밥이 남긴 풍미를 잊지 못할 듯하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하코다테 비어 전문점으로 이동했다. 하코다테 맥주는 에일 특유의 향을 부드럽게 감싼 듯이 보드랍게 넘어간다. 홋카이도 야경을 보기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하코다테 맥주 전문점에 왔다. 직접 맥주를 제조하는 케틀과 월풀을 갖춘 곳이다. 국제맥주대회 에일부문 금상 수상작답다.
해가 낮게 깔리며 산의 실루엣을 남기고 빨갛게 가라앉을 때쯤 하코다테산으로 서둘러 옮겼다. 12분가량 비탈진 길을 오르다 보니 하코다테로프웨이라는 케이블카가 보였다. 주저 없이 올랐다. 올라서 하코다테 야경을 볼 수 있는 명당을 잡고 기다렸다. 근데 야경은 오후 7시40분에 시작된다고 했다. 삿포로행 기차편은 오후 7시54분인데. ㅠㅠ 오후 7시5분쯤 한국에서 온 커플에게 명당자리를 남겨두고 역으로 항했다. 아쉬웠다. 30분만 기다리면 되는데. 다음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오자. 그런 메시지나 보다.
지금은 삿포로행 열차에 올라 이번 여행 마지막 여행기를 쓰고 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홋카이도를 다시 찾을 거다. 혼자 와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둘이 왔을 때 아름다움과 풍미를 만끽할 곳이라. 근데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제 반백을 넘긴 내가 다시 사랑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까. 이처럼 감정의 소비에 게으른 인간이. 이번 여행이 나의 마지막 홋카이도 여행이 아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