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잎도 따고 왕릉도 보고
딸 고등학교 친구 엄마들이 밭에 오기로 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은 이제는 그저 그런 사이인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가 매달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이런저런 인연들로 만나는 사람 중에 마음 맞는 사람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도, 서로가 하려는 일을 응원해주고 동참해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이 딸 친구 엄마들이 있어, 작년에 비공개 지역 안에 있는 효릉을 제외한 조선왕조 왕릉 39기와 패주가 되어 ‘능’ 대신 ‘묘’를 쓰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까지 탐방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딸 친구 엄마들이라 하지 않고, 그저 내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그중에 콩잎으로 만든 물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둔 이가 있다. 작년에 우리 밭에서 따간 여린 콩잎으로 물김치를 담가주었더니, 남편이 껌뻑 넘어간 모양이다. 해서 올해도 콩잎을 따러 오겠다고 했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콩잎도 따고 왕릉도 탐방’하기로 했다. 효릉은 1년에 단 하루 8월 18일, 제향일에만 일반인에게 탐방을 허하고 있다. 우리는 미탐방 왕릉인 효릉을 탐방하기로 하고, 콩잎 따는 날을 제향일에 맞춰 잡았다. 친구가 이사 간 곳이 멀어 콩잎 따러 오는 날 따로, 왕릉 탐방 가는 날 따로 잡기가 곤란했다. 말 그대로 ‘콩잎도 따고 왕릉도 보고’가 되는 날로 잡아야 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콩잎과 왕릉 조합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의 관심사인 농사와 역사탐방도 그렇게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현재의 관심사는 그거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겠지. 사랑만 변하겠는가, 관심도 변하는 거지.
드디어 8월 18일 효릉 탐방을 끝냈다. 이로써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조선왕조 왕릉 탐방을 다 마쳤다. 하나의 미션을 완성한 느낌이었고, 버킷 리스트 하나를 마친 셈이다.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탐방 뒷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에 빠져 콩잎 따는 일은 뒷날 아침에 하기로 했다. 하기는 오후보다는 아침이 나을 것이다. 풀숲에 사는 모기가 아주 작지만 독하니, 오후보다는 아침이 덜 물리겠지.
농막이 있는 밭에는 오리알태를 심었는데, 여린 콩잎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처서가 가까워 혹여 콩잎이 억세어지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역시 계절을 속일 수는 없다.
콩잎 물김치는 연두색 여린 콩잎으로 담가야 한다고 했다. 서리태는 오리알태보다 늦게 심었기에 서리태 심은 밭으로 갔다. 예상대로 서리태는 아직 여린 콩잎이 많았다. 여린 콩잎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일렁거렸다.
“야호~”
친구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콩잎을 따기 시작했다. 여린 콩잎 세 장씩을 일일이 따냈다. 흥이 많은 친구라, 콩잎을 따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어보니, 주병선이 부른 <칠갑산>을 개사해 부르고 있었다. <콩잎 따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아~ 무슨 설우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이 부분만 무한 반복하면서 부르는데, 노래에 설움은커녕 흥겨움이 가득 담겼다. ‘콩밭 매는’ 대신 ‘콩잎 따는’으로 두 음절만 바꿨을 뿐인데도, 흥겨움을 담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니 노래가 달라졌다. 친구가 무한 반복하는 소절을 나도 얼마 전에 무한 반복하면서 뙤약볕에 앉아 잡초를 뽑았었다. 음치라서 노래방 가자고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하는 나인데도 일을 하다 보면 저절로 노래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조상들이 힘든 밭일 하면서 불렀던 노동요가 전해져 오는 것이겠지.
나는 흥겹게 콩잎을 따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 웃겨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나중에 카톡으로 보내줄 생각이다. 내가 콩밭 매느라 고생한 콩밭에서 친구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콩잎을 딴다.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콩밭 매는 아낙네가 있으면 콩잎 따는 아낙네도 있겠지. 한참 콩잎을 따던 친구가 한마디 했다.
“내가 이 더운 날, 뙤약볕에서 이렇게 한 잎 한 잎 콩잎을 따야 하냐구?”
“좋아서 하시면서.”
“내가 아니라 남편이 콩잎 물김치를 미치게 좋아한다니까.”
“콩잎 김치는 남편이 좋아하고, 콩잎 따는 것은 00맘이 좋아하잖아요.”
“남편이 좋아하니까 해주는 거지.”
“그게 사랑이겠지요.”
“사랑은 개뿔.”
“이 뙤약볕에 콩밭 맨 사람도 있어요.”
“그러게 말이야. 누구는 콩밭 매고 누구는 콩잎 따고.”
“그러게요. 그래도 ‘콩밭 매는 아낙네’보다 ‘콩잎 따는 아낙네’가 낫지 않을까요?”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부지런한 친구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콩잎 물김치를 담갔던 모양이다. 소쿠리에 산처럼 솟은, 씻어둔 콩잎 사진과 양념장을 붓기 전 사진을 보내왔다.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나도 콩잎 물김치에 도전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