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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Sep 14. 2022

4년 차 농사일지 13화

아직도 깻잎 향을 맡으면 아리다

  농사를 지으며 빼놓지 않고 심는 작물 중 하나가 들깨다. 다른 농가들은 순치기를 세 번 정도 해주었다는데, 우리는 한 번 순치기를 했을 뿐이다. 다시 순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살펴보려고 고개를 숙였더니, 짙은 깻잎 향이 올라온다. 이렇게 짙은 깻잎 향을 맡으면 마음이 아리다.


<짙은 향을 날리고 있는 깻잎>


 중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엄청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학교 갔다 왔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셨다. 한 살 터울 여동생 말로는 아버지가 너무 아파 택시를 불러서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아팠었는데, 어젯밤부터는 물도 삼킬 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간 후 54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십이지장을 제거하고 위와 소장을 잇는 대수술이었다. 나에게 아버지의 병명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냇가에서 빨래하면서, 아버지 병문안 갔다 온 동네 사람들 입을 통해 떠도는 소문들을 들으며 아버지 상태를 짐작하였다. 살아날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들렸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서웠다. 나는 매일 울면서 신을 향해 기도했다. 제발 우리 아버지 살려주시라고.      

 

 부모 없는 집에 남겨진 여섯 명의 아이들. 열네 살인 나,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열세 살 여동생, 열 살인 남동생, 그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 여동생, 그리고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여섯 살 남동생과 다섯 살 여동생. 여섯 명 아이들은 무엇인가 만들거나 사서 먹어야 했고, 이제 무엇을 만들고 먹는 게 내 손을 거쳐야 했다. 


예정에 없던 일로 급하게 집을 비운 거라, 여섯 명의 아이들이 먹을 음식도 음식을 만들 재료도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시골 아이들은 부모가 밭에 나가 일을 하니 솥뚜껑을 들 수 있을 때부터는 밥을 하고 국을 끓일 수 있다. 나 역시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밥을 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국거리나 반찬거리로 쓸 재료가 없었다는 거다.      

 

 집안을 살펴보니,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밀가루 한 포대, 도시락 반찬을 위해 사다 놓은 멸치, 그리고 큰 병에 담긴 유채기름이 몇 병 있었다. 나는 깻잎으로 반찬을 만들어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냇가 과수원 밭에는 일부러 씨를 뿌리지 않아도 해마다 알아서 자라나는 깻잎들이 있었다.


<쑥쑥 자라고 있는 들깨>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아 나무가 우거진 과수원으로 혼자 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바로 아래 한 살 터울 여동생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니, 네 살 터울 남동생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이 남동생은 한 번 밖에 나가면 깜깜해질 때까지 집에 들어오는 애가 아니었다. 나는 남동생이 놀 만한 데를 뒤져 친구들과 한창 놀고 있는 남동생을 데리고 깻잎을 뜯으러 가곤 했다. 


  깻잎을 뜯어다 씻은 다음, 더러는 장독대에서 퍼온 간장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더러는 송송 썰어 밀가루하고 섞어서 유채기름으로 부침개를 해서 먹었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던 동생들이 지겨워하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분 숙모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김치 쪼가리 한 번 갖다 주지 않았다. 나도 넉살이 없어 가서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뒷집에 사는 이웃집 아주머니도 우리 집에 와서 전화를 사용하면서도 밑반찬 한 번 들고 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빈말이라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마주 보는 집 아주머니가 멸치 볶은 것을 딱 한 번 가져다주었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얻을 데도 없고, 누가 도와주지도 않으니 우리는 54일 동안 날마다 깻잎을 먹었다. 깻잎이 우리의 구황식물이었다.    


<꽃이 핀 들깨>

  

  어머니는 54일 동안 딱 한 번 집에 왔다 갔는데, 여섯 살인 남동생, 다섯 살인 여동생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어린 두 동생은 우리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냇가에서 주로 놀았다. 병문안 갔던 동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까 걱정된다고 했던 모양이다. 집으로 온 어머니 손에는 그 어떤 먹을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반찬을 만들어 놓지도 않고 서둘러 갔다. 그래도 그 어린 두 동생이 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 셋만 챙기면 되니까.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동생들 깨워 아침 챙겨 먹이고 학교에 가는 일이 버거웠는데, 그나마 어린 동생 둘이 빠져나가니 좀 살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명이 길어 그해 여름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났지 싶다.


  아버지가 퇴원하고 왔을 때 어머니는 아이들 얼굴과 목 뒤에 마른버짐이 허옇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영양실조로 인한 마른버짐이었다. 한동안 어머니는 민달팽이를 볼 때마다 잡아다 마른버짐이 핀 자리에다 달팽이 몸체가 사라질 때까지 문지르곤 했다.      

  

 집으로 온 첫날 어머니는 내게 유채기름을 다 써버렸다고 타박했다. 그게 가슴에 콕 박혔다. 그때 울면서 따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54일 동안 동생들 굶겨 죽이지 않고 살아낸 것만도 장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침묵을 택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나는 심리적으로 어머니와 멀어졌을 것이다. 부모 없는 동안 동생들 건사하고 학교 다니느라 애썼다가 아니라, 유채기름을 다 먹어버렸다는 말뿐이라니……. 나는 열네 살 여름 이후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는 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않아도 동생들이 많아 응석 한 번 제대로 부린 기억이 없는데, 너무 일찍 어른아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슬프고 아린, 나의 열네 살 여름이었다.  


 이제 나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때의 어머니보다도 스무 살이 더 많다. 내가 느꼈을 공포 못지않게 어머니가 느꼈을 공포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혹여 과부가 되어 어린 자식들과 남겨질까 봐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당신의 두려움이 너무 커 열네 살 딸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겠지. 그때의 어머니를 이해하면서도 아직도 짙은 깻잎 향을 맡으면 마음이 아려온다. 열네 살 여름이 생각나서.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는 게 좋은데, 아이답게 자랄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어른이 되었다고 아이답게 자랄 권리를 누리지 못한 슬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툭, 툭, 불현듯 그 슬픔이 흔들리며 다가올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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