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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Sep 04. 2022

4년 차 농사일지 11화

너구리보다 먼저

 작년에 땅콩을 너구리와 반반씩 수확했던 터라 올해는 너구리보다 먼저 수확하고 싶었다. 너구리가 양심껏 조금만 먹으면 좋을 텐데, 너구리는 혼자 다니지 않고 떼로 몰려다니는 것인지, 왔다 가면 하룻밤 새에도 전혀 수확할 수 없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옆 밭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도 너구리 때문에 땅콩을 아예 심지 않는다고 하신다. 우리처럼 도시반 농촌반 살며 농사짓는 이웃들 중에도 작년에 너구리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어, 올해는 아예 땅콩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에 우리가 그나마 반이라도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은 너구리가 우리 땅콩밭보다 이웃 땅콩밭을 먼저 공략한 덕이었다. 올해는 너구리가 공략할 땅콩밭이 적어서 우리 밭이 타깃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땅콩이 다 자랐다 싶으면 너구리보다 먼저 수확해야지 하고, 일찍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다. 


<수확철이 다가온 땅콩 >


 8월 23일 처서가 지나자 땅콩밭 초록색에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짙푸른 녹색이 좀 옅은 색으로 변했다고 할까. 그리고 오늘 9월 2일. 아직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잎에 검은 점들이 생기지는 않아도, 4월 17일에 씨를 파종하였으니 130일도 지났고, 어느 정도 영글지 않았을까 싶어, 하나를 캐보기로 했다. 어라, 잡아당겨도 잘 올라오지 않는다. 원래는 줄기를 잡고 당기면 쉽게 올라오는데,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인해 땅이 질어 그런 것 같았다. 


  비닐하우스로 달려가 호미를 가져온 다음, 호미로 줄기 주변을 좀 판 다음에 잡아당겼더니 뽑히는 느낌이 왔다. 땅콩 뿌리와 함께 굼벵이가 올라왔다. 굼벵이가 갈아먹은 땅콩들이 보였다. 굼벵이 같은 미물도 좋고 실한 것은 알아보는지 토실토실 살찐 땅콩만 공략했다. 흙을 좀 털고 올라온 땅콩들을 살피니, 아직도 덜 자란 것들도 있었지만, 그물 무늬가 선명해진 게 대다수였다. 캘 때가 된 것이다. 겉껍질이 거무스름한 것도 많이 보였다. 썩은 것이다. 8월에 비가 독하게 많이 와서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겠어. 하늘이 허락한 것만 먹어야지.’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땅콩을 살피는데, 가만있던 굼벵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땅콩 뿌리를 뽑고 흙을 털어내고 있는 동안 잠시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죽은 척 연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땅콩 뿌리와 같이 올라온 굼벵이>


 “니는 어쩌냐?”

 살려고 바둥거리는 굼벵이를 보고 말을 걸었다.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갖게 된 버릇 하나가 있는데, 주변 동식물들을 보면서 말을 거는 것이다. 들고양이한테도 말을 걸고, 고추밭에 날아온 벌에게도 말을 걸고, 맹렬한 기세로 뻗어가는 환삼덩굴을 노려보면서도 말을 건다. 누가 들으면 저 여자 미친 것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노랑이였으면, 야옹, 하면서 아는 척을 할 텐데. 굼벵이는 꿈틀꿈틀 움직일 뿐이다. ‘그래, 한 마리 정도는 살려주어도 괜찮겠지.’ 좋은 마음으로 갈 길 가라고 내버려 두고. 계속 땅콩을 캐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 뿌리에서는 굼벵이가 두 마리가 나오더니, 그다음 뿌리에서는 굼벵이가 세 마리나 나왔다.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처음 살려준 것은, 이미 살길 찾아 떠났으니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죽여야 한다. 뿌리 작물에는 굼벵이가 적이다. 땅콩 대신 내가 나서는 수밖에. 어쨌거나 살생은 살생이라, 굼벵이를 죽이면서도 영 찝찝하다. 내가 똥파리 쉬파리가 싫다고 했더니, 나이든 지인이 그랬다. 그래도 똥파리 쉬파리가 있어 썩어가는 것들이 빨리 퇴비화되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싫어하지는 말라면서. 이 굼벵이는 어디에 도움이 될까. 지렁이는 땅속에 길을 내고 다녀 토양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데, 이 굼벵이는 이 지구상에 어떤 이로움을 주는 것일까. 핸드폰을 열고, ‘굼벵이의 이로움’이라고 쳐서 검색해 보려다 말았다. 오늘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아까 친구 전화도 바쁘다면서 끊었는데.     

  

  부지런히 땅콩을 캤다. 어느 정도 캐면 손으로 일일이 뜯어내어서 물로 깨끗이 씻어 고추건조기 채반에 놓고 데크 위로 가져갔다. 데크 위는 바람이 잘 통해서 널어놓고 말리기 안성맞춤이다. 워낙 일머리가 없어 부지런히 움직이는 데도 진도는 더디다. 마음만 조급하게 앞서니, 점심도 대충 빵과 커피로 때우고 말았다. 참,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겨우 한 줄을 캤을 뿐이다. 그리고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씻어 말리고 있는 땅콩>


  다음날 아침에 채반에 있는 땅콩들을 다시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뜯으면서 선별하고, 씻으면서 선별하는 데도, 씻고 말리면 또 선별해서 버릴 것들이 나온다. 바로 덜 여문 것들인데, 건조되면서 쪼그라들어 있다. 

  지인에게 주문받은 5kg를 제외하고, 로컬푸드 매장에 출하하기 위해 1kg씩 3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일 밤 10시 18분에 세 개 다 나갔다는 문자를 받았다. 돈으로 따지면 하루 일당도 안 나왔지만, 당일 출하, 당일 판매에 일단은 기쁘다. 

 

<로컬푸드 매장에 출하한 땅콩>


  아직도 수확을 기다리는 다섯 이랑의 땅콩이 있다. 너구리보다 내가 먼저 캐야 할 텐데, 비 소식에 다시 수확하는 일이 미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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