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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Aug 31. 2022

4년 차 농사일지 9화

참 어렵다, 고추 농사

 비가 와도 너무 온다. 하늘이 구멍이 난 건지, 억수같이 뿜어댄다. 연신 마을 확성기에서는 “연천군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재난안내방송이 들려온다. 봄에는 가뭄으로 애태우더니, 다음에는 폭염, 그리고 이제 폭우로 연일 강타한다.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데, 도와줄 마음이 없나 보다. 이제 하늘과 동업(同業)하는 농사와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도 하고, 세계적인 기후 변화로 우리나라도 8월을 우기로 보고, 앞으로는 그에 맞는 농작물을 키워야 한다고도 한다.  

    

 시작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만 두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여보, 우리 내년부터는 고추농사 짓지 맙시다.”

 “글쎄다. 고추농사 안 지으면 뭐 지으게.”

 “콩농사 짓지 뭐.”

 “콩농사는 쉽냐? 농부들 얘기 안 들었어. 천 평 콩농사 지어봐야 오십만 원 남는다고 했잖아.”

 “그래도 그게 낫겠어. 이거야 원. 고추 농사지으니, 비가 안 와도 걱정, 비가 많이 와서 걱정. 날씨가 안 도와주니, 온갖 병이 다 오잖아. 이게 뭐야. 이렇게 농사지으려고 농사를 시작한 게 아닌데.”  


 

<병든 고추들을 솎아내다>



  유기농 고추 농사를 짓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올해는 다른 농부들과 얼추 비슷하게 농약을 뿌려대고 있다. 옆 밭은 탄저병이 와서 고추 농사를 망쳤다. 우리 고추밭도 탄저병에 걸린 고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보이는 족족 따서 버리는 수준에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확 퍼져서 두 손 두 발 다 들 수도 있다. 탄저병만이 아니다. 고추에 올 수 있는 온갖 병이 다 왔다고 보면 된다. 작년하고는 완전 다르다. 고추밭에 들어가기가 겁나고 짜증 나고 그렇다. 고추 농사를 안 지어도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남편도 올해는 짜증이 난다면서 좀 생각해 보자고 한다. 

 “고추건조기 산 것 때문에 그래?”

 “그것도 그렇고.”

 “고추건조기야 우리 먹을 고추 홍고추로 사다가 식초에 깨끗이 씻어 말리면 되고.”

 “이제야 고추농사에 대해 조금 알 거 같은데, 여기서 포기하는 게 좀 그래서.”


  여러 말이 오고 간 끝에 남편이 정년퇴직하기 전까지는 고추 농사를 쉬기로 했다. 나는 남편 정년퇴직 이후에도 고추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지만, 일단은 그 말에 동의했다.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고 잘 자라준 고추들>

 

 며칠 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유튜브에서 본 거라며, 고추 농사 잘 짓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으면 병이 덜 온다드라, 이렇게 해야 했는데, 당신 때문에 느슨하게 고추 지지줄을 묶었더니, 오히려 그늘지고, 습해서 더 역효과가 난 것 같다느니, 새로운 것을 배운 아이처럼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나는 ‘고추’에 ‘고’자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데, 계속 듣고 있자니, 고역이 따로 없다. 더 이상 듣다가는 머리가 폭발할 것 같다. 열을 내고 설명하는데 말허리를 끊고 불쑥 들어갔다. 

  “내년부터 고추 농사 그만두기로 했는데, 왜 자꾸 고추 농사 짓는 법을 배워?”

  내가 듣기에도 짜증이 만땅 묻어난 목소리다. 

  “배워야 다음에 적용하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 남편이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나는 앞으로도 고추 농사는 생각이 없는데.”

  나는 이참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말뚝을 쾅 박았다.

  “3년 후에는 고추 농사 지을 건데.”

  “누구랑? 나랑?”

  “지금까지 고추 농사 공부한 게 아깝지 않아?”

  “아니, 전혀 아깝지 않아.”

  “당신은 뭔 포기가 그렇게 빨라?”

  “힘드니까 그렇지.”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딨냐? 세상에.”

  “그래도 고추 농사는 아니야.”

  “당신은 뭐든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게 문제야.”

  “내가 포기한 일이 뭔데?”

  “아무튼, 항상 너무 쉽게 포기해.”     

 항상 너무 쉽게 포기한 게 뭐냐고 따져 물으려다 참았다. 


 갑자기 혈압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농사를 지으며, 농사가 생업이 아니라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힘든 농사일을 감내했다. 생업이었다면 마음이 부대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생업처럼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보이니 덜컥 겁이 났다고나 할까. 무기력에 빠진 사람과 사는 사람도 힘들겠지만, 의욕 충만한 사람과 사는 일도 만만하지는 않다.      

  

<공판장으로 보내기 위해 집합장소에 가져다 놓은 고추 상자>



집으로 오자마자 딸에게 고추밭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고추 농사 지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딸이 “엄마, 3년 후에 일은 3년 후에 걱정하세요. 제가 보니 아빠, 3년 후에 고추 농사 힘들어요. 지금도 무릎이 안 좋은데, 3년 후에 고추 농사 지을 수 있겠어요?” 했다. 

  그렇구나. 괜히 열 내며 싸우고 왔구나. 3년 후 일은 3년 후에 싸워도 될 것을. 뭐가 급하다고 3년 전부터 싸우고 왔을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추 농사는 참 힘들다. 정말로 그만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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