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농사, 삶으로서의 농사
공판장에 보낸 홍고추 경락가가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 포장을 막 마쳤을 때 마실 왔던 체리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부터 비가 많이 온다는데, 왜 보내? 그냥 다 건조 시켜.”라고 했던 말이 걸려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빠르면 새벽 2시 30분 정도에는 문자를 받는다. 3시가 되어도 문자가 없다. 빨리 낙찰이 안 되었다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다. 4시가 되어도 감감무소식.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유찰되는 것은 아닌지. 어제저녁부터 시작한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차게 내리더니 호우로 변해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처럼 쏟아지고, 공판장에서 오는 문자를 받지 못한 나는 안절부절. 체리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비가 오는 날은 경락가가 낮게 나온다고.”
“비랑 고추 경락가가 뭔 상관인데요?”
“이러니, 아직 멀었다는 거야. 비가 오면 경락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니까 그렇지.”
“얼마나 차이나는 데요?”
“한 돈 만 원 차이나지.”
4시 40분이 되어서야 기다리던 문자가 드디어 왔다. 그런데, 헐, 하는 탄식이 나올 정도의 경락가에 맥이 확 풀렸다. 밤을 꼴딱 지새웠는데도 잠이 더 멀리 도망갔다. 잠을 청하는데, 오라는 잠은 안 오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며칠 전에만 해도 20kg 한 상자에 74,000원 나왔는데, 오늘은 48,000원이라니, 단지 비가 많이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마 이렇게나 똥값으로 경락가를 칠 줄은 몰랐다. 체리 할아버지 조언대로 그냥 다 건조 시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왼 종일 선별하고, 포장하고, 박스테이프까지 다 붙인 상태라 공들인 시간이 아까워, 그냥 공판장으로 보낸 것인데, 이렇게나 억장이 무너지게 하다니…….
인터넷을 검색해 공판장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전화를 걸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받지 않았다. 9시를 기다려 전화를 넣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고 남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낮은 경락가에 대한 억울함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어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저기요, 제가 생각하기에 홍고추 경락가가 너무 낮게 나온 것 같아요.”
“성함이?”
이름을 대었다.
잠시 후 직원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최고가가 5만 원이네요. 4만 8천 원이면 최고가 다음이라…….”
“뭐라고요? 오늘 최고가가 5만 원이라고요? 무슨, 이런, 지금 여기 농민들이 올해 고추 흉작이라고 난리인데, 최고가가 5만 원이라고요?”
차분하게 말하려고 하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 오늘 경락가가 그렇게 나왔네요.”
“왜 그렇게 헐값에 경락가가 나왔는데요?”
“지금 경매사들은 다 퇴근했는데, 아마 비 때문에 그럴 겁니다.”
“비요?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그렇지,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작년보다 비료값, 농약값, 농자재값이 두세 배 뛰었는데, 작년보다도 헐값에 경락가를 후려치면, 농민들은 뭐 먹고 살라고…….”
“오늘 이런 전화 왔었다고 전달해 드릴게요.”
남자직원은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냥 일반직원인 모양인데, 더 이상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항의성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경매사들한테 전달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전달하였다 하여도 경매사들이 이런 항의성 읍소에 귀를 기울일지도 장담하지 못하겠고. 정말 날씨 탓일 수도 있고, 홍고추를 경락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 안 왔을 수도 있고, 유찰을 면한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어쨌거나 농사지은 나는 억울하다. 너무 억울해서 이런 전화라도 걸어본 것이다. 그렇다고 분이 다 풀리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나 한참을 울었다. 아홉 식구의 생계가 달린 농산물을 공판장으로 보내놓고 노심초사 밤잠을 설쳤을 우리 아버지. 생계를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직업으로서의 농사를 끝내 놓지 못하였겠지. 나는 직업으로서의 농사라기보다는 삶으로서의 농사를 택한 것인데도, 이렇게 억울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