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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ice Apr 17. 2021

독일은 어떤 곳이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독일로 돌아가는 이유


나는 친한 사람들에게 독일 욕을 정말 많이 한다. 독일은 이게 별로고 저게 나쁘고 저게 못생겼다고. 독일인 연인에게도 독일 욕을 서슴없이 하는 정도니, 말 다했지.



물론, 독일이라고 하면 소시지와 맥주, 슈바인학센과 옥토버페스트, 재미없는 유머,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사죄만 떠오르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점잖고 사려 깊은 나라처럼 느껴졌다. 처음 독일에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이런 몇 안 되는 이미지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아, 하리보가 독일 젤리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재미가 없는 나라군. 맥주가 맛있으니 좋긴 한데, 재미는 없어. 이게 2주 간의 독일 여행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 놓고 나는 그 재미없는 나라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독일어라고는 A2 레벨이나 될까 싶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뭐, 재미없으면 사두고 안 읽은 이북 읽고 찜해두고 인트로도 안 본 넷플릭스나 실컷 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졸업 작품을 쓰자!라는 생각으로 갔다. (그리고 내 독일 교환학생은 넷플릭스, 친구, 파티, 연애로 요약되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독일은 참 재미없는 나라였다. 여행과 일상 사이엔 아주 큰 틈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배우는 시간이었다. 여행자로 갔을 때는 내 무비자가 끝나기 전에 독일을 떠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일 년을 살러왔더니 전입신고가 필수라 전입신고하러 갔더니 공무원이 다짜고짜 나는 독일어로 안 하면 상대 못해주니 무조건 독일어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안 그래도 독일어 할 건데... 기가 팍 죽은 채 전입 신고를 했더니 있지도 않은 TV수신료를 내라고 하질 않나, TV가 없어서 안 냈더니 독촉 우편을 보내질 않나. 은행 계좌 없으면 비자를 안 준대서 은행 계좌를 만들려고 했더니 일반 계좌를 만드는 날의 약속을 잡고, 비자 재정 보증용 계좌를 만들기 위해 또 약속을 잡으라고 하고, 계좌에 연결된 카드의 비밀번호는 우편으로 왔는데 카드는 없었다. 며칠 지나니 카드가 또 다른 우편으로 왔다. 그래! 이제 계좌가 있으니 비자 좀 줘라! 했더니 9월에 오라니? 나는 4월에 도착했는데? 기가 막혀서 살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공유기만 있으면 쉽게 인터넷 설치를 할 수 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내가 살았던 기숙사는 인터넷을 쓰려면 공유기와 랜선을 사서 지하에 있는 사무실에 가서 신청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사무실은 수요일에만, 그것도 한정된 시간 동안에만 열려있었다. 당신이 목요일에 입사를 했다? 축하합니다! 일주일을 기다리셔야 해요! 입사 일주일 만에 어렵게 인터넷 연결을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천둥번개만 쳐도 나약한 독일의 인터넷은 끊겼다. 이도 저도 안 되고 심심하니 외식이나 해볼까 하면 맨날 피자 아니면 파스타, 그것도 아니면 정확한 국적은 알 수 없는 아시안 푸드. 교환학생들 후기에 왜 그렇게 기숙사에서 한국인 학생들끼리 해먹은 음식 사진이 많은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도 한 번 부대찌개 16인분, 잡채 20인분을 해서 동네 한국 교환학생 다 불러다 잔치를 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걔들 라이프 스타일 참 구닥다리라고 하지만, 당시엔 참 힘들었다.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택했던 터라 수업은 더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매달 은행에 가서 내 계좌에서 다른 계좌로 돈을 이체하고 싶다고 부탁해야 했고(자동이체 물어보니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유는 모른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적인 말을 듣고 한 번 따질 수도 없었다.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기간이 끝나고 한동안은 비자가 없어 쫓겨나는 건 아닐까 괜히 벌벌 떨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독일 계좌 해약을 위해 다시 관청을 찾았는데, 독일인이고 공무원인 연인이 내 옆에 있자 웃는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담당 공무원을 보는 게 속상했다. 내가 계좌 개설을 위해 그녀를 처음 찾아갔던 날이 생각나서.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던 무뚝뚝한 그녀 때문에 진이 쭉 빠졌던 그 봄날이 떠올라서. 혼자 행정업무를 다 처리하고 난 뒤 초여름엔 한참 향수병이 심했는데, 그땐 커튼을 열지 못했다. 낮이 상상도 못 하게 긴 독일의 여름, 그 많은 빛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이렇게 지쳤고 괴로운데 밖이 너무 밝다는 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하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지금까지 그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의 삶을 사랑했다. 외부 식음료를 절대 금지하는 독일 식당에서 내가 선물로 가져온 소주를 맥주잔에 몰래 타고는 소맥으로 건배하자던 친구 덕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초여름에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개해줬고, 월드컵 경기에서 독일이 졌을 때도 한국이 이겼으니 축하 파티를 하자며 나를 초대해주었다. 어느 여름날, 축제에 갔다가 다른 친구 생일 파티에 간다기에 나 혼자 집에 가던 길에 인종차별을 당하고 너무 화가 나서 쓴 페이스북 포스트를 보고는 나를 불러 위로의 되너를 먹으러 가주기도 했다. 독일의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경험해봐야 한다며 나를 본가로 초대해주었고, 그곳에서 받은 환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친구가 있어서 동네에 새로 생긴 한국 치킨집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연인을 만났으니, 말하자면 내 독일 생활은 그 친구로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른 나라였지만 독일도 꽤 재미있게 살만한 나라라는 걸 알려주었다.

  어감은 좀 나쁘지만, ‘독며들었다’고나 할까. 초여름의 독일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한여름의 독일은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은 친구와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독일 생활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독일은 맥주만 유명한 줄 알았지, 와인도 맛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살던 동네 성당에 샤갈이 디자인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 줄도 몰랐다. 긴 낮을 즐기기 위해 수시로 축제와 파티가 열리는 줄은 당연히 몰랐다. 매주 열리는 장터에 나가면 싼값에 로컬 와인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푸른 하늘 아래 웅장하게 자리 잡은 대성당이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는 줄도 몰랐다. 마음이 풀리니 보지 못했던 그 몰랐던 예쁘고 귀여운 구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엄마가 나와 함께였다. 내가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했던 풍경을 보며 다시금 내가 독일을 잊지 못해 돌아온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함께 한국어로 독일 욕을 실컷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몰랐던 혹은 잊고 있었던 여름을 한 조각씩 발견하면서부터 독일과 사랑에 빠졌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마인츠 대성당. 일년 내내 보수 공사 중이었지만 건너편 오페라 극장 계단에 앉아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엔 안정이 찾아왔다.
내가 살던 동네는 와이너리들이 주변에 많은 곳이어서 맥주보다 와인을 훨씬 많이 마셨다. 와인 축제도 정말 자주 열렸다.


함께 교환학생을 간 동생과 무작정 가본 소도시. 주말이어서 더 조용했지만 아기자기 하고 귀여웠다. 독일도 멀리서 보면 꽤 아름답네, 싶었다.


그래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게 독일은 어떠냐고 물으면 나는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몸서리치도록 끔찍하게 싫은 점과 지금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사랑한 점 중 어디에 비중을 두고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대외적으로는 홀로코스트를 반성하지만 길거리에선 여전히 칭챙총과 니하오가 판치는 곳이라고? 정직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약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공보험 제도가 잘 되어있지만 사보험이 없다면 당신은 예약 없이 아플 수도 없는 곳이라고? 어디에서든 과하게 친절하지 않은 서비스를 제공해 갑과 을이 느껴지지 않지만 당신이 아시안이라면 아무도 당신의 주문을 받고 싶어 하지도, 계산을 도와주고 싶어 하지도 않는 곳이라고? 모두가 영어를 할 줄 알지만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영어를 쓰려다간 자리에서 쫓겨나 통역해줄 사람을 구해야 하는 곳이라고? 하리보가 맛있지만 술안주는 백날천날 프레첼인 재미도 맛도 없는 곳이라고?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된다. 한국도 그렇지 않은가. 한낮의 경복궁이나 덕수궁, 서촌만 보고, 서울의 대형 미술관과 박물관만 보면 참 아름답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맛집과 카페 투어만 하면 당연히 살기 좋아 보이고 사랑에 빠지기 좋은 나라다. 그러나 살기 시작해보면 밑도 끝도 없는 학벌주의와 인맥으로 모든 것이 통용되고, 동일 범죄 동일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여성과 남성의 급여 차이는 여전히 세계 일등이고, 찍어낸 듯한 외모와 몸이 기준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다이어트 강박과 죽음으로 내몰고, 주택 소유와 안정적인 연금만이 삶의 목표인 나라.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어딘가 끔찍한 건 독일이나 한국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나고자란 한국을 좋아하듯, 나의 다른 모습들을 만들어준 독일을 좋아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이 말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희망을 발견한다. 독일의 관료주의는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남았고 인생 경험치를 얻었다. 독일의 인종차별은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사람들은 기꺼이 나를 보호하고 도우려 했다. 독일의 음식은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지 않겠다는 마음가짐과 값싼 식재료 가격 덕에 직접 요리해 나와 타인을 대접하는 일의 행복을 배웠다. 독일의 습하고 추운 겨울은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겨울밤에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게 해 준 여름의 친구들 덕에 우울해질 틈은 없었다. 불평불만을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그래서 독일로 돌아간다. 해가  시는 되어야 지는 여름의 독일로. 연인을 보러, 친구를 보러, 내가 사랑한 독일의 여름 풍경을 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희망을 발견할  있었던 여름의 독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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