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 물씬나는, 여름의 맛.

by 시선siseon

흙바닥부터 건물, 하늘 끝까지 찜통처럼 푹푹 찌는 습한 무더위에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는다. 퍼붓고 나면 좀 시원해질까 싶어 시원한 물줄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지만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이들에게 당황스러움만 선사했을 뿐, 더위는 꺾일 줄 모른다. 어항.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늘 어항이 떠오르는데, 물속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어딘가 밀폐되어 있는 곳에 있는 기분이라 그런가 싶다.


그리고 흙냄새. 흙냄새가 난다. 빈틈없이 꽉꽉 메워진 도시의 시멘트 바닥에서는 쉬이 맡을 수 없는 냄새. 그런데 장맛비가 그친 어항 같은 날씨에는 흙냄새가 폭풍처럼 몰아친다. 고온에 다습이 겸해져야 나는 이 냄새는 그래서 여름의 냄새다. 옛날엔 동남아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던 기억의 냄새였는데 이젠 여기서도 여사인걸 보면 지구가 아픈 것이 확실한 듯도 하다.


흙냄새가 나는 여름에는 더위를 버텨내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일단 더우니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제법 이겨낼 수 있다. 한 겨울 19도를 가리키던 보일러 온도계가 29도를 가리키고 있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몸에는 제 아무리 더운 공기라 한들 땀 한 방울 만들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숨만 쉬어도 배가 고프다. 무언가 먹겠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후덥 한 공기들이 가차 없는 공격을 시작한다. 한 걸음, 두 걸음. 부스럭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더위를 쫓아줄 얼음잔에 커피도 한 잔 내려보지만 이미 요기를 한 후엔 그만큼의 에너지가 소진된 기분이다. 움직였고, 더웠고, 허기를 채웠고, 몸을 식혔다. 다른 계절이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일들이 여름날엔 모두 슬로 모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여름의 무기력증은 내 탓이 아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쓸데없이 부지런해진 머릿속이 무기력증이 무럭무럭 자라날 양분이 되고, 온갖 망상과 몽상에 마음껏 몸을 맡겨도 영원같이 느리게 가는 시간이 조급한 마음을 잠재운다. 역시나 오늘도 눅진한 여름의 맛에서 헤어 나오긴 틀렸다. 이건 내 탓이 아닌걸. 무기력한 몸뚱이에 입술만 조금, 달싹거려 한 문장 내뱉곤 이내 여름의 맛에 다시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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