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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Jan 17. 2022

엄마, 제발 그 설거지 하지 마오(2)

죄책감 이라는 무거운 짐

그리고 9개월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그새 항암 후 2년이 지난 엄마는 본가로 내려가셨지만, 3개월에 한 번씩 혹시나 재발하지는 않았는지 추적 차 CT를 촬영하러 서울에 오셔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코로나는 새로운 시련을 주었으니. CT촬영 기간에 각종 다른 관련 진료를 다 보시는 엄마는 열흘 정도 머무르셔야 하는데 원래 계셨던 요양병원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것이다. 마침 바쁜 시기를 넘긴 나는 우리 집에 오시라 했다. 그렇게 열흘간 엄마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아가와 신랑이 가고 나면 혼자 재택근무를 하던 내 일상에 24시간 누군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같이 밥을 챙겨 먹고, 산책을 하고, 무언가 필요하지만 엄마 혼자 사지 못하셨던 것들을 구하러 다녔다. 그 덕에 4년을 넘게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서울 시내 백화점들도 가보고, 삼성서울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다녔지만 나름 알찬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역시, 또다시 찾아온 갈등의 순간이 있었으니. 엄마가 설거지를 해대는 순간이었다. 하도 하지 마라 하니까 엄마는 심지어 '설거지 쌓아놓으면 복 나간다'는 소릴 하셨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진지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정말 다 좋은데,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것만은 너무 불편한데 어떡하면 좋을까. 우리 해결책을 좀 찾아보자. 


엄마의 대답은 역시 늘 하던 소리셨다. 잠깐 하면 되는걸 왜 그러냐. 쌓아놓으면 지저분하다 등등. 그렇지만 나는 식기세척기가 잘하는 걸 왜 굳이 하냐. 설거지를 할 체력과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하고 싶다. 근데 엄마가 하는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또 내가 해야 되는데, 꼭 그래야겠냐. 


엄마는 마지못해 '알았다'라고 했다(안 하시겠다가 아니라 알았다고). 그리고 나는 엄마 눈에 보이게 하지 않기 위해 설거지 거리가 나오면 식기세척기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갈등은 봉합되는 듯했으나, 유종의 미 까지는 무리였나 보다. 결국 내려가시는 날 그 바쁜 아침에 설거지를 하시는 엄마를 보고 또 폭발한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나 벌주려고 일부러 그러냐고. 내가 안 했으니까 엄마가 결국 해야 하는 거니 나 안 했다고 벌주는 거 아니냐고. 엄마는 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설거지하는 거보다 소리 지르는 네가 더 싫다고. 그렇게 엄마는 조심히 가시라는 나의 마지막 인사에 눈길 한 번 안 주고 내려가셨다. 


열흘간의 특별했던 날들의 추억을 그렇게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서 나는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함에 넋을 놓고 있었다. 아니, 마음 편하다 하시면 그냥 하게 두면 되는데, 대체 나는 왜 그럴까. 엄마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볼 때 내 반응은 화, 분노, 짜증 등등 모든 부정적 감정의 덩어리가 한데 확!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왜. 왜 그렇게 까지나 이성이 작용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나는 걸까.  


가장 가까운 답은, 내가 설거지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니까. 내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아픈 엄마가 하고 있어서 정도? 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차분히 생각해 본 나는, 그것이 사실은 나의 죄책감에서부터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엄마는 완전한 옛날 사람이다. 심지어 음식을 해놓고서 하시는 말씀이 늘 "내 손이 내 딸이라고, 내가 이렇게 해 먹어야지"를 한 숨 섞어 말씀하신다. 그렇다. 딸년이라는 것은 자고로, 엄마의 부엌데기 시녀처럼 대하던 과거를 반영하는 그런 문장을 서슴없이 내뱉으시는 분이다. 당연하건대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분이라 지금도 딸들에게 자신을 위한 희생을 당연하게 강요하시는 분이다. 특히나 투병생활 이후 요양병원 가시고부터는 어느 집 딸은 직장 다 때려치우고 엄마 옆에 붙어있다더라, 암에 도움 된다는 온갖 좋은걸 다 보냈더라, 반찬을 해 보냈더라 등등 갖은 딸들에 대한 비유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안다. 엄마가 원하는 '딸 상'을. 저런 딸들이 그렇게나 부러우신 엄마에게 나 같은 딸이 얼마나 성에 안차실지도 잘 안다. 결혼해서도 주방에 한 번 안서는 딸(우리 집 집안일 분담 상 요리는 나보다 더 잘하는 신랑이 담당이다), 명절에 음식 한 가지 안 하는 딸, 맞벌이하느라 집안일을 각자 분담하고 주양육자는 당연히 '엄마'가 아니라 '부부'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딸이 눈에 옳게 보일 리 없다. 그렇지만 나는 부모가 내가 원하는 부모가 되어줄 수 없듯이 나 또한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되어줄 순 없다고,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는 없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원하는 딸이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해줄 수 없는 마음이 때때로 짠하고, 죄송스럽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갖은 부러운 딸들을 나열하실 때마다 마음을 부여잡지 않으면 쉽사리 죄책감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아직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무려 엄마가 설거지를 하면 그렇다. 가뜩이나 엄마 원하는 대로 요리에 식사를 챙겨내지도 못하는데 설거지까지 엄마가 하고 있으면 나는 그냥 내가 몹쓸 딸인 것 같다. 그렇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나의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 몹쓸 딸로서 벌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지독히도 이성이 작용할 수 없었나 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내 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들이 다 깡그리 무시당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벌 받는 기분. 딱 그 정도. 


엄마는 나의 이런 뒤틀림을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 엄만들 애쓰지 않을 리가 있나. 엄마가 원하는 딸의 상이 아닌 것이 이해가 안 되고 씁쓸한 마음에 잔소리야 하시지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속상하지만 마음으로 삭히고, 그래 어쩌겠냐고 받아들이시느라 간혹 대화의 끝에 나는 쓴맛이 나도 느껴질 정도인데.  


제법 잘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기대치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마음이, 결국 '설거지'를 만나 늘 폭발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 괜히 그런 것은 없다. 이렇게 그 근본까지 파헤치고 나서야 뭐든 해결이 되는 법.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무의식적인 반응을 하지는 않겠지. 이렇게 또 하나, 모난 뿌리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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