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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Feb 09. 2022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윤회와 단일성의 세계관

싯다르타는 그러니까, 아주 인간적인 수도자이자 구도자였다. 모자랄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수행생활을 하고, 그 와중에 늘 '모범적'이고 '우수한' 태도로 수행을 해온 그였지만, 그가 해탈해나가는 과정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그래서 인간적이다. 


그가 당시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세존, 고타마를 만났을 때 그는 고타마를 떠나겠노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설법에는 당신 자신이 깨달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지 않냐고. 자신은 그 깨달음의 순간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누군가로부터 구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진정 자기로부터 발견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다음 걸음에서 싯다르타는 사랑과 쾌락의 속세에 젖어들고 만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았지만 그것으로 여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 그가 가진 것은 세 가지. 생각할 줄 아는 것, 사유. 기다릴 줄 아는 것, 인내. 그리고 금식할 줄 안다는 것. 그러나 그 여인이 원한 것은 부와 권력이었고, 싯다르타는 그것을 얻기 위해 속세에 머무른다.


그가 가진 세 가지는 권력과 부 따위를 너무도 손쉽게 얻게 해 줄 만큼 귀한 것이었지만, 권력과 부를 얻고 나서 그는 오히려 그 세 가지를 잃고 만다. 사유와 인내와 금식하는 법을 잃은 그에게 내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를 내는 새를 잃은 그는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갈망하던 순간에 그는 다시 완전성을 의미하는 주문, '옴'을 외우며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다시 깨달음의 길로 향한다. 그 길을 함께하는 벗, '진정으로 듣는 자'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와 함께 강을 벗 삼아 지낸다. 그러나 사랑의 여인 카마라와 자신의 아들이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고, 독사에게 물린 카마라의 죽음을 함께한 뒤 끝까지 그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 아들이 그를 떠나 세속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그 모든 인간적인 어리석음, 맹목적인 충실과 그것이 이루어내는 일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렇게 윤회하는 고통, 끝까지 겪어내어 해결하지 못하면 되풀이되는 고통,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의 전체, 어떤 소리에도 자아를 몰입시키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단일화된 하나의 소리로 느끼는 순간, 그는 다시금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것은 단일화된 완전성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완전한 것, 완전한 단일의 것이라고. 


완전한 단일의 것, 단일성을 이해하자면 이에 대한 강의 비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강이 흐르는 데에는 목적이 존재한다. 강은 폭포수를 향하여, 호수를 향하여, 바다를 향하여 흐르고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또다시 수증기가 되어, 비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져 다시금 샘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새로운 목표지를 향해 흐른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 어디에 존재하는 강물이 이 모든 윤회의 과정 중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지는 구분할 수 없다. 그저 끝없이 윤회하는 한 과정 중에 있을 뿐이며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것도, 미래에 있을 것도 없이 강에는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즉, '현재의 강'이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강은 수많은 윤회의 과정 속의 모든 것을 이미 모두 담고 있음으로써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그것이 삶이라면 인간 또한 이미 무엇인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존재이며, 사물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필연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승려라는 근성 속에, 오만 속에, 영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자아를 인식함으로써 오만에 가득 차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필연적으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스스로 맛보는 것"이다. 그의 벗이었던 고빈다는 이 지점에서 그와 대비된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세존 고타마의 제자가 되어 승려로서 수십 년을 수행했던 고빈다는 그 모든 세속의 번뇌와 끄달림을 직접 경험한 싯다르타와 대비된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달리 그 모든 것을 삶에서 겪어냄으로써 - 필연적으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스스로 맛봄으로써 - 결국 깨달음을 얻는다. 사고와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 맹목적이고 아이 같은 삶을 '소인'이라 경시했던 그는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겪어냄으로써 그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사고하는 자가 그들과 나은 점이란 오직 한 가지, 그 모든 것의 단일성을 '의식하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오만에 가득 찼던 자신의 자아를 비로소 내려놓고, 오히려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호기심으로, 경외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모든 깨달음의 결론은 '사랑'으로 흐른다. 깨달음을 통해서 싯다르타는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모든 것을 단일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세계를 사랑하는 것,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 것, 세계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는 이렇게 정리하고서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소설, 분명 소설인데 이론서, 사상서 같은 느낌의 소설이다.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완전성을 가지는 단일성과 그래서 그 모든 것을 경멸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헤세의 사상이 온통 쏟아부어진 소설 싯다르타. 이 작품의 세계관이야 말로 헤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사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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