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로망, 나의 가장 행복한 욕망

by 시선siseon

비어있는 공간이 채워진 공간보다 아름답다.

아름답게 채워진 공간은 비워진 공간보다 아름답다.


전자도 맞는 말이고, 후자도 맞는 말이다. 아름다움과 꾸밈이 목적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놓인 물건들은 보통 치우고 나면 그 공간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당장 한쪽 벽을 채운 빨래건조대를 치워버리고 나니 그 공간에 비친 불빛마저 고즈넉해 보이는 것처럼. 그런데, 비어있는 공간에 걸어둔 초록색 해바라기 그림은 볼 때마다 일당 백, 공간을 아름답게 한다. 별다르게 꾸미지 않은 공간이 그림 한 점 걸었을 뿐인데 제법 아늑해졌다.


나는 공간에 대한 로망이 많다. 물론 기생충에 나오는 대저택 마냥 완벽히 조명이 세팅된 드넓은 공간도 - 여기서 포인트는 조명이다 - 로망이다. 그러나 나는 순간순간 내가 누릴 수 있는 공간, 한 장면이 주는 감상에 쉬이 빠져드는 편이고, 거기엔 대단한 장치가 필요치 않다.


소싯적 사들인 책들로 그득그득 찬 책장이 다인 방에 갖고 싶어 했던 예쁜 책상도 결국 들이지 못했는데, 어느 날 커피와 에세이집을 들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더니 하루 종일 빛 드는 시간 따위 없는 줄 알았던 방에 마침 지는 해의 끝자락이 살풋 드리운다. 그저 밖에 주차장만 멀거니 비추는 줄 알았던 유리창은 좀 더 멀리 보니 제법 푸르르게 우거진 나무 몇 그루도 보여주질 않나, 그리하여 불현듯, 역시 빛은 직사로 비치는 것보다 애태우며 드리울 때 더욱 쓸쓸하고 고즈넉한 맛이 난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 한순간. 그 순간 때문에 그 공간은 이제 나의 하루의 루틴, 클리쉐의 공간이 되었다. 해질 무렵이면 괜스레 찾아 앉고 싶은 공간. 그 순간을 다시 찾는 것이 하루의 사치 중 하나인양 매번 찾아 먹고 싶어 진 순간.


그런 공간들을 자꾸 갖고 싶다. 어쩔 땐 비어있어서 아름답고, 어쩔 땐 공들여 아름드리 채워져서 아름답고. 아니면 그저 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누릴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소중한 공간. 어디서 봤는지 기억조차 안나는 글의 한 구절인데 공간을 이야기할 때면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해질녂 집 현관 앞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것을 위해 늘 퇴근 시간을 놓치지 않고, 어떨 때는 행여 지는 해를 놓쳐버릴까 봐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서둘러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담배 한 대, 맛있게 피우는 모습이 세상 행복해 보였다고.


아직도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 물론 이제 완전히 원래의 이야기가 나의 로망에 변색되었겠지만 -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늘 조바심 나고 불안하고 덜컹거리는 마음이 내려놓아 지는 공간. 마음의 템포가 일순간 느려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루틴.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나의 루틴으로 채워지고 나는 공간을 통해 매 순간 로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공간을 욕망하는 것은 나의 가장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또 하나 확보하는 것이다. 공간이 가진 로망, 그것은 나의 가장 행복한 욕망이다.


(1,517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작과 끝이 만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