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의 그녀, 은정이 있었다.
고등학교 교실. 전교생이라곤 100명 남짓한 학교에서 서로의 얼굴을 모르기가 쉽지 않은데, 은정은 그녀가 고3이 되어서야 같은 반이 되어 처음 알게 된 아이 었다. 반에서 중간보다도 조금 작은 키에 얼굴이 새하앴고, 염색하지도 않았는데 햇빛에 비추면 갈색이 되는 긴 머리를 늘 하나로 단정히 묶고 다니는 아이었다.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수가 특별하게 적거나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목소리가 크지 않고 차근차근하며 어디 나서는 일이 없을 뿐. 딱히 성적이 높지도, 낮지도, 무언가를 맡아서 하지도 않아서 시끌벅적한 여고 교실에서 눈에 띄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맡은 바는 조용히 해내는 은정은 말없이 공간을 메우는 따스한 공기 같았다.
그녀가 그런 은정과 짝이 되어 놀란 것은 그 조용하고 평안한 분위기, 그것만은 아니었다. 은정은 쉬는 시간이나 청소시간, 점심시간처럼 별 하릴없이 앉아있을 때면 늘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딱히 어떤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 어쩌다 보면 그녀의 손은 늘 은정에게 잡혀있었다. 은정이 손을 잡는 방식은 꼭 은정 자신 같았다. 꼭 잡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살며시 감싸듯이 자신의 조그맣고 하얀 두 손으로 그녀의 한 손을 잡고는 가만가만 쓰다듬는 것이었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그 하얀 손이 어루만지는 것은 마치 아끼는 어떤 물건을 가만히 쓰다듬듯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손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쓰다듬는 것. 그러니 그 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그저 어느 순간에나 그저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몇 번, 그녀는 은정에게 왜 손을 잡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은정은 그저 조용히 웃으면서 그냥, 손 잡고 있는 게 좋아서라고 답할 뿐이었다. 상대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냥 그렇게 두었던 것이 나중에는 그녀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나중에는 그녀도 그 순간을 제법 좋아하게 되었다. 은정이 가진 따스함과 평온함, 차분함이 그 하얀 손을 통해 그녀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듯 했다. 예민하고, 무엇 하나 마음 놓을 수 없었던 전쟁 같은 고3 시절의 불안이 그 순간만큼은 가만히 잠재워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그녀는 깨달았다. 이별의 순간,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싶은 그녀의 충동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사람으로부터 오는 애착과 유대의 감정에 늘 예민한 그녀가 가장 불안한 순간. 끊임없이 혼자가 되는 시간에 그녀가 애타게 찾은 것은 바로 그 하얀 손이었다. 그저 가만히 자신을 어루만져 주던 따스한 손. 이유도, 조건도 없이 그저 평안을 전해주던 그 손길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부드럽고 따스한 손을 가졌던 은정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은정의 그 따스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은정은 또 누군가의 손을, 어쩌면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낳아 어루만지며 키우고 있을까. 이름조차 기억이 가물했던 은정이 10년도 넘은 세월 뒤에 갑작스레 생각난 그녀는 은정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퍽 궁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은정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 그 따스함을 함께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한 그이에게 몹시, 샘이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