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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Mar 15. 2022

한병철, "타자의 추방"

카페를 운영하는 절친과 함께 서울에 있는 유명하다는 어느 카페를 간 날이었다. 이제는 이미 카페를 운영한 지 10년도 넘어 완전히 자리 잡은 친구다. 그렇지만 10년도 더 전부터 우리는 시장조사를 핑계로 사실은 커피를, 그리고 카페라는 공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을 이유로 늘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도 카페인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첫 번째 카페를 갔다가 서점을 들렀다 두 번째 카페를 간 참이었다. 그런데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나름 핫 하다는 곳으로 골라온 곳인데, 그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새로운 곳인데 하나도 새롭지 않은 공간. 어떤 커피가 어떻게 나올지 조차 완전하게 예상되는 공간.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니까 이미 '핫 한 카페'의 공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드톤과 키가 큰 열대 나무의 인테리어, 표지가 예쁜 잡지책들, 카페 브랜드를 새긴 겹쳐진 종이잔, 작은 사이즈의 음료들, 군데군데 셀카를 위한 거울, 빈티지한 LP나 종이 등의 소품들. 너무나 클리쉐적인 핫한 카페의 모습에 우리는 새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한병철 作의 "타자의 추방"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같은 것의 테러만이 작동한다"가 크게 새겨진 얇은 책에는 그날 우리가 느낀 모든 것이 있었다. '타자'가 부정되는 사회에서는 같은 것의 긍정성이 작동하고,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생산이 생산적일 수 없게 하는 상태를 만든다. 어떠한 시간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 또한 소비자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혼수상태'로 끊임없이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게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들 중에서도 우리의 경험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경험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이므로 그 본질이 고통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니 고통을 주지 않는 것,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표상들을 주입시키는 '자기 선전'으로 이끄는 비극을 가져다준다고.


요즘 나의 화두가 다시 '타자'로 돌아온 바, 절반쯤 소화하고 내려두었던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얇은 두께 무색하게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책이지만 이런 책이야 말로 '경험의 고통'을 주는 것이라, 이번에는 다시 찬찬히 읽으며 완독에 도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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