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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Mar 15. 2022

타인을 위한 공간

이승윤의 '교재를 펼쳐봐'라는 노래를 듣는다. 타인의 비극이 고작 '교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는 정도의 쓸모임에 대한 비아냥. 그렇지만 노래를 짓는 자신 역시 타인의 비극을 양분 삼는 일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비아냥까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작 머리에도 이런류의 소설가 독백이 나온다. 소설가라는 것은 창작자라기보다 그저 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옮기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나는 사실 그 모든 고백이 의아했다. 나에게 글쓰기가 타인의 것이 양분이 된 적이 있었던가. 나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일종의 '나 파먹기'였고, 그래서 오히려 소재가 오늘도 나라는 사실이 신물 나고 지긋지긋하기 일수였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가 나에게서 벗어날 날이 오기를, 그러나 그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조차 파고 파고 또 파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쓸 이야기가 없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도의 희망뿐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나 자신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타인과,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은 모든 것의 결과물이 곧 나의 글이겠지만 그 또한 나의 관점에서 쓰이는 이야기이니 나에겐 소위 3인칭이 불가능했다. 물론 3인칭의 글을 쓴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조차도 나 파먹기가 너무나 지루할 때 그저 '나'에 대한 인칭을 바꾸는 정도였달까.


그러니 내가 글로써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기대는 나의 고민이 또한 누군가의 고민이기도 하다면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공감이다. 내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동화된 감정에 위로를 받듯이 내 글 또한 공감과 공유의 작은 유대를 만들 수 있기를. 그러나 그런 어설픈 기대 정도로 정말 공감과 유대를 끌어내기엔 아직 글의 내공이 일천한 바, 갈길이 구만리고.


그래서 오늘은 나로 가득 찬 내 안에 타인의 비극과 희극이 오롯이 들어찰 수 있는, 내가 섞이지 않고도 홀로 이야기로 살아남을 수 있는 타인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객관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를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기를, 그 정도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렇게 타인의 어떤 것을 오롯이 삼켜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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