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타자의 추방 中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 중 "진정성의 테러"라는 챕터를 읽으면서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부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진정성의 원래 의미는 "사전에 만들어진,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는 게 저자의 정의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오직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은 당연히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타인과 다르고자 하는 진정성인 '다름의 진정성' 또한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사회의 동형성을 배가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다름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사회의 동형성을 배가시키게 되는가? 저자는 다름의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인 '잡다함'만을 허용한다면서, 이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잡다함'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또한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다름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과, 상이성을 가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다음 문단에서 찾고자 했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중략)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즉, 다름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나르시시즘 적인 강제를 낳게 되는데, 이것이 상이성과 가장 대립되는 부분은 "타인과 직면할 때"이다. 타인과 직면할 때 진정성의 강제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관을 지음으로서 공허감을 낳을 뿐이다. 하지만 상이성을 가진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이다. 타인과 직면할 때 형성되는 것이라.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이 책의 서두에 언급된 동일자와 타자 간의 변증법으로 돌아간다. 동일자는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형태와 내적 밀도, 내면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즉, 타자가 없는 것은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서로 무관심한 병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창궐하는 덩어리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따라서 타자가 배제된다면 그저 창백한 통일성, 균일화하려는 시도만이 존재할 뿐이며, 동일자와 타자가 공존해야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을 근원적인 일치로 모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과 직면할 때 형태와 내적 밀도, 내면성을 가지게 되는가,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관을 시도할 뿐인가. 비교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진정성과 대비되어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상이성(Alteritat), 혹은 단독성(Singularitat)을 가진 개인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비교로부터도 벗어남으로써 타자를, 혹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 안정된 자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