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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Mar 26. 2022

뉴욕 최상류층 리그가 재생산되는 방식, "애나 만들기"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 2022)"

애나만들기라는 넷플릭스의 여주인공은 포토그래픽 메모리, 즉 한 번 보면 모두 기억하는 능력과 더불어 "generational rich", 즉 타고난 부자와 같은 고급 취향,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세련됨을 가진 25세 여성이다. 그 능력이 너무도 대단해 수백억 대 사기 미수를 저지르는 그녀는 이런 대사를 한다. 뉴욕에서 돈은 어디에나 있고 넘쳐흐르지만,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재능은 매우 귀한 것이라고. 


과연 그러하다. 그녀가 설립하고자 했던 Anna Delby Foundation은 그녀 자신의 안목에 맞는 최고의 예술 작품 컬렉션과 건축 디자인, 음식과 호텔, 사교모임을 위한 인맥을 갖춘 곳이 될 것이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제시하는 비전과 아이디어들은 당대 최고의 큐레이터, 디자이너, 셰프 등등 그녀의 드림팀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두가 그 꿈이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 꿈은 그녀 자신에게는 가장 사소했던 것, 그러나 세상에서는 가장 중요했던 단 한 가지로 인해 물거품이 된다. 그녀가 사실은 스스로 말하고 다녔던 대로 700억 원대 신탁자금을 물려받는 독일인 상속녀가 아니었다는 사실. 만약 끝까지 이를 숨기는 데 성공해서 은행으로부터 수백억 원의 대출을 받아 정말 그 재단이 설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가 성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 말마따나 재능은 매우 귀한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가 '거의' 성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이 이야기에서 드러낸 뉴욕의 소위 찐 부자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곧 돈이 흐르는 방식이 매우 놀라웠다. 기본적으로 뉴욕의 사교클럽은 매우 폐쇄적이다. 그런데 그 폐쇄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방식은 절대적으로 '인맥'이라는 것. 누구의 추천을 받는가. 누구로부터 소개를 받는가. 소위 얼마나 '핫'한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사교계에서 가장 강력한 누군가의 추천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그들 세계에서 '여권'과 다름없고, 곧 두 번의 의심 없이 사교계의 일원으로 프리패스한다는 것. 


우리의 주인공 애나는 소위 사교계의 여왕벌에게 추천을 받아 내부 서클로 입성했고, 그 순간부터 그녀가 추진하는 Anna Delby Foundation의 설립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10만 원을 가진 사람은 만원을 가진 사람의 부러움을 받지만 100만 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진리는 어디에서나 통하는 법. 그래서 남들 눈에는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가진 그들 사이에서도 '돈을 버는 것'은 역시나 초미의 관심사다. 그러니 우선 누군가의 신용으로 인해 내부 서클로 '인'한 자가 가진 재능, 소위 '돈이 될 것 같은' 재능과 기회 앞에서는 뉴욕의 흘러넘치는 자본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불나방처럼 들러붙는다. 그 불나방 같은 돈에 대한 욕망이 고작 스물다섯 살 여자아이 앞에 순식간에 수백억의 돈다발을 쌓아주게 된 것.   


그래서 그녀는 당당하다. 중범죄의 금융사기범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냐고 되묻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과 비전이었기 때문에 수백억 원의 돈도 그녀에게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돈은 쓰라고 있는 것이라고,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퍼내는 물을 대하는 듯한 돈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의문스러웠던 것. 그녀의 시작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나면 당연히 궁금한 것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론 불친절한 설명 탓이었겠지만, 총 9부작 중 1부나 할애한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리고 그녀를 꿈꾸게 한 것은 결국 '패션잡지'였다! 나는 이 점 또한 너무도 신선하면서도 의아했는데, 소위 트렌디한 미국 드라마에서 늘 쓰이는 클리쉐인 '보그'지를 보며 내 어린 시절의 불우함을 잊고 늘 새로운 삶을 꿈꿨어요가 여기서도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허허허허. 뭘까. 패션잡지는 도대체 어떤 힘이 있어서 서방 10대 여성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가. 


참고로 나는 패션이나 명품,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패션잡지를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만들고 움직이게 하는 업계 자체를 존경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 잡지가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다는 스토리는 글쎄,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런지 접할 때마다 의아함을 느낀다. 사실 애나는 몰락한 러시아 집안 출신의 가난한 여학생이었고 지독히 보수적인 독일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저 '패션잡지'를 통해 모든 것을 섭렵한, 그리고 패션잡지가 그리는 세상이 존재하는 뉴욕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지고 상경한 것으로 묘사된다. 패션잡지 속의 세상이 정말로 존재한다며 정신과 의사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명하는 그녀를 보면서 소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묘사되었던 패션업계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래. 물론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누리는 '최고의 것'의 리그는 분명 존재한다. 그 존재를 밖으로 알리는 것이 패션 잡지의 영역이자 역할이라면, 누군가는 그 잡지를 보고 그 리그로의 입성을 꿈꾼다는 것. 


애나 만들기. 처음엔 단순히 사기극, 그러나 젊은 여성이 벌인 사기극이라 흥미를 조금 끄는 정도인 줄 알았던 이야기인데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남긴 작품이다. 돈의 흐름,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가 움직이는 방식 외에도 사회가 여성의 실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 애나 만들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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