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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Feb 01. 2024

그래도 행복은 있다 #데이트

날씨가 우중충 했다. 모처럼 나의 데이트 상대가 오는 날, 전날부터 날씨 어플을 들락거렸지만 오후부터 뜬다던 해는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먹으러 갈까. 이것 역시 전날부터 지도 어플을 켜놓고 한참 고민했으나 마땅히 당기는 곳이 없어 예약도 동선도 아무것도 정한 게 없었다. 고급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니면 마음에 들어 두 번이나 갔던 멕시칸 음식점? 모처럼의 데이트니 만큼 특별한 곳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막상 수술 이후로는 '뭐가 먹고 싶어'라는 감정이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어젯밤 술에 잔뜩 취해 전화가 와서는 내가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 한다던 그는 역시, 술톤의 발그레한 얼굴로 나타났다. 두근거리던 심장 어쨌냐는 내 물음에 '편안~해졌다'며 낄낄 거리는 그가 마냥 밉지는 않은걸 보니 어지간히 오랜만인 데이트에 제법 설레는구나 싶다. 


지난번에 왔을 때 만차라 주차에 실패했던 공영주차장에 어쩐 일로 자리가 남아있는 것이 시작이었다. 주차비가 시간당 6000원을 넘기는 동네에서 주차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거늘, 기적같이 남아있던 한 자리에 주차를 하고 나와 걸으니 추운 날씨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 갈까? 뒤늦게 어디서 주워들은 테이가 한다는 햄버거집을 찾아보았으나 주차장과는 한참 먼 곳이고. 어딘들 어떠랴. 그냥 검증된 멕시칸 음식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식사시간을 제법 넘긴 1시 반경, 어쩐 일로 웨이팅조차 없는 우리의 맛집에 매우 순탄하게 들어섰다.  


그리고 걷는다. 아직 날씨는 우중충 하지만 맛있게 식사를 마치니 배가 부르므로. 근처 호수로 향한다. 구구, 구구. 아직도 군데군데 얇게 얼어있는 호수 위로 미끄러지듯 걷는 거위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우아한 새하얀 깃털에 어울리지 않는 저 꾸에엑 꾸에엑 울음소리는 대체 무엇인가. 그래도 온통 회색빛 풍경을 밝혀주는 건 새하얀 거위들 밖에 없으니 자꾸만 시선이 간다. 


걷다 보니 제법 쌀쌀한 날씨를 피하고자, 그리고 더 걷기에 슬슬 힘겨운 내 체력을 구하고자, 근처 커피집을 찾아본다. 미리 알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려는 찰나, 통유리창이 눈에 띄는 카페가 보인다. 브런치..라고 쓰여있는 것이 좀 불안한데, 커피만은 안 팔면 어쩌지? 안되면 나오자며 용기 있게 들어갔건만 아니나 다를까, 종업원이 친절하게 일러준다. 이곳은 식사를 제공해서 커피만 따로 판매하지는 않는다고. 그렇지만 친절한 종업원이 지금은 자리가 있으니 들어오시라며 웃으며 자리를 안내해 준다. 다음엔 식사하러 한 번 들러주시라는 말을 덧붙이며. 오 럭키! 괜스레 황송한 기분으로 창가에 앉고 보니 자리도, 뷰도 참 마음에 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딸기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매우 진하게 내려진 커피와 딸기가 듬뿍 들어간 딸기라떼가 테이블에 놓였다. 달달한 브런치와 참 잘 어울릴 커피.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식사하러 꼭 한 번 들러야 겠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렇게 미뤄뒀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 둘, 풀던 어느 순간, 그렇게 기다리던 해가 저 멀리서부터 슬며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노란 테라스. 흰색 야외 테이블과 의자. 테이블에 포인트로 놓인 양귀비 꽃과 파스텔톤의 인테리어가 은근히 스며드는 빛을 받아 한결 더 포근한 분위기를 낸다. 이 순간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얼른 그에게 카메라를 쥐어준다. 그는 무던히 두어번, 셔터를 눌러 준다. 


아직도 부어있는 내 얼굴, 화장기 하나 없는 내 얼굴이 한켠에 자리한 사진이 그럴리 없는데 퍽 마음에 든다. 사진이라곤 관심 없는 그가 웬일이람! 동그란 눈을 뜨고 다시 보니 포인트는 내 표정이다. 지금 이 순간, 아직도 부은 얼굴을 하고도 수술의 고통도, 회복의 인내도 잊은 행복한 표정. 그와의 모처럼 데이트가,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같은 데이트가 이 순간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서, 때마침 찾아와 준 햇살이 마냥 고마워서. 다음에 또 오고 싶은 장소가 생긴 것이 기뻐서. 어떤 이유를 생각해도 좋은 것만 떠올랐던 완전한 순간을 오롯이 담고있는 표정. 그래, 그래도 행복은 있다. 이렇게 오늘 하루, 또 병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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