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서 철학하는 아이들

내딛는 걸음에는 오답이 없다

by 시선siseon

불시착.


대학원생이던 어느 날, 어떻게 건너 건너 손에 받아 들게 된 계간지의 이름이 '불시착'이었다. 학부생들이 모여서 출판사를 설립했으며, 계절마다 한 번씩 발행물을 낼 것이라 했다. 스치듯 잠깐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출판사 대표의 첫인상은 무언가 이렇게 자신들의 행위를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꽤나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저 세상과 부딪히는 게 힘든 나이려니, 하고 두었던 책이었는데 오늘 문득, 5년 만에 다시 펼쳐 들었다. 불시착.


그들은 스스로를 이 지구 상에 '불시착'한 존재들이라고 규정했다.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과학을 공부하는 특수목적 대학인 카이스트에서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논하고, 담론 형성을 꿈꾸는 자신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쓰지 않고서는, 내뱉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어서 모임을 갖고, 매거진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글을 말미에 붙인 그들은 그래, 누가 봐도 일반적인 카이스트 학생들은 아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외롭게 했을까. 이 대학을 왔다고 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과학고를 나왔을 테고 철저히 이성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학습, 심지어 매우 열심히 그리고 잘 학습하여 진학하였을진대, 그들은 철학을 탐닉하고 글을 쓴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사회 부적응자 마냥 취급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시나리오는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원래 뛰어나서, 혹은 주변 환경에 따른 높은 학업성취도, 그리고 카이스트 진학. 대전으로 왔으니 가족과도 떨어지고 기존의 늘 우월하던 환경과는 동떨어진 생활에 동반되는 자괴감 - 학부생들을 만나보면 종종, 대학에 와서 '진짜 천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 성실과 열심만으로는 스스로의 기대치에도 부응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심지어 주어진 과제,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더욱 탐닉하고 있는 자신들. 그 어긋남에서 오는 현기증. 뭐 이 정도의 시나리오.


대학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좀 하는 게 뭐 어때서, 자신들을 잘못 착지된 상태로 정의한 그 로직을 어쩌면 너무 잘 알겠어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간지를 내는 정도의 행동을 취한 이들이 멋져서 문득, 내가 받아 든 창간호 외에 몇 호가 더 발행되었을지가 매우 궁금해졌다. 다행히 책에서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찾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을 해보았으나 그들의 계간지 '불시착'은 그 해 가을, 2호를 끝으로 더 이상 출판되지 않은 듯했다.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규정된다는 것은 무섭다. 과학과 이성을 추구하는 공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하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 다른 걸 하는 게 뭐 어때서. 우리나라 교육 과정상 어차피 대학쯤 가지 않으면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평생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다른 것을 고민하는 것조차 모난 돌 마냥, 잘못 착지된 부적응자 마냥 스스로를 취급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물론 하던 것을 잘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일지 모르지만 뭐 쉬운 길만 간다고 인생이 다 잘 풀리더냐. 굽이굽이 치열한 고민을 한 흔적은 결국 내 삶에 남는 양분이 되기도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꼰대 같은 소리는 사실 절반쯤, 나에게 하는 소리다. 나는 늘, 고민이 많고 현실 적응이 어려웠다. 자기 확신이나 여유로움, 분명한 목표보다는 불안함과 불확실함, 부족함이 앞서고 그래서 가는 걸음걸음마다 분야가 달라지기도 했다. 사실은 아직도 평생의 업이 무엇 일지에 대한 답을 찾는 중에 불과한 어중이떠중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해 제법, 여유가 생겼다. 아직도 답은 찾지 못했지만 답을 찾으려 아등바등 해왔던 나의 20대,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의 걸음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꽤나 의미 있었고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터다. 늘 고민했고 그래서 새로운 걸음을 디뎠기에 내가 걸어온 길은 남들과 달랐고, 이제쯤 되자 지금도 아주 새로운 걸음도 디뎌볼 수 있을 것이라는 어설픈 확신도 있다. 그래서 사실은 나, 그리고 그들에게 불시착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때에 맞는 고민을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기에 오답 또한 없는 것이라고. 그저 한 걸음 걸음들 모두가 '나'를 만들어 주는 소중한 디딤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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