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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Oct 27. 2020

동네 미용실

동네 미용실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꼬불꼬불한 파마를 한 게 나의  미용실 경험의 시초이다. 머리에 분홍 롯트를 하얀 부직포와 노란 고무줄로 말아서 보자기 같은 걸 둘러쓰고 한참을 예뻐지겠다고 앉아 있었다. 그 시절 엄마들은 모두 양배추와도 같은 뽀글뽀글한 파마를 했다. 엇비슷한 헤어스타일로 뒤에서 보면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바쁜 엄마들은 멋은 내고 싶은데 드라이 기술도 없고 밋밋한 생머리는 손질이 어려우니 덜 초라해 보이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했나 보다. 미스코리아도 한껏 웨이브 진 머리를 산발한 사자머리를 하던 시절이었고 그게 또 이쁘다 했던 시절이었기에 다들 비슷한 취향에도 만족해하던 그런 미용실의 풍경이었다.


햇살도 따스했던 가을날, 정말 오래간만에 단골 미용실을 찾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시내 중심가의 미용실을 가기가 두려웠던 나는 점차 산발이 되어가는 머리를 다듬을 가까운 미용실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집 앞 상가의 조용한 1인 미용실을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가보았고 가족 모두가 단골이 되었다. 내 머리를 맡기는 미용실은 한 번 정해지면 쉽사리 바꾸기가 힘들다. 평범한 얼굴을 가진 나에게 헤어스타일은  중요하기에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혼자 운영하는 미용실이기에 예약을 잡지 않으면 이용이 힘들다. 처음에는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것 같더니만 단골이 은근히 늘었는지 전화를 해서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한 번에 한 명 이상 잘 받지 않는 데다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인원 시간에 맞추어 예약을 받기에 미용사의 모든 정성과 시간은 내 독차지가 된다. 조용하고 오롯이 나만 신경 써주는 게 좋아서 미용실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늘 가족이나 누군가를 배려하는 주부였다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누가 머리도 감겨주고, 헤어스타일만져주고, 마실 차도 가져다주고, 이야기도 나누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게다가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기분 전환은 덤이다. 미용실에 가는 날은 나를 위한 날로 마음먹은 그런 날인 게다. 시간 또한 오래 걸리니 그 시간을 오직 나에게만 투자한다는 게 주부에게는 흔한 일상은 아 것이다.


깔끔하고 아담한 인테리어에 의자도 달랑 두 개 놓인 단출한 미용실에 오늘은 파마를 하러 갔다. 미용사는 머리에 파마약을 바르고 롯트를 말았고 나는 못생겨진 얼굴로 오랜만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를 소소히 하다가 오늘 아파트  정전으로 전기를 못 쓰게 되는 바람에 갑자기 미용실을 오게 되었다는 나의 일상에서부터 정치, 경제 이야기에 미용에 대한 이야기까지... 장장 네 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수다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한껏 한 것 같다. 마지막엔 아파트 대추나무 이야기로 끝이 났다. 어떤 아저씨가 아파트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서 씻지도 않고 먹는데 그 아저씨 괜찮겠느냐는 걱정으로 마지막 수다가 마무리되었다. 생각해보니 웃음이 난다. 도대체 아파트에서 대추를 따먹는 아저씨가 화젯거리라니. 동네 미용실에 앉아 있는데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 기분이었다.


 파마를 하는 중에 염색을 예약하신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는데 미용사와 나를 위해 뜨끈한 레몬 생강차를 사 오셨다. 뜨거운 인심에 그 생강차가 절로 달콤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를 나눠 마시면서, 난생처음 보는 동네 아주머니와 미용사와 나,  이렇게 세 명 만의 수다의 세계가 거침없이 열렸다. 오늘 정전이 된 아파트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아이 얘기를 하면 그동안 미용실에서 일하며 만난 다양한 아이들 이야기며 그 부모들의 삶까지 서사가 펼쳐진다. 미용사는 머리만 만지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미용실 맞은편 가게인 뷰티숍이 뭐하는 곳인지 궁금하다는 한 마디에 눈썹아이라인 문신 이야기로 흘러 불법 시술의 문제점까지 논했다. 그야말로 토론의 장이 열렸다. 그다음은 오늘의 뉴스가 도마 위에 올라 최근 불거진 백신에 대한 불안함을 이야기하다가 예방접종 끙끙 앓았던 독감 경험담까지  나왔다. 전기가 들어오고 아주머니가 TV에서 시청하다 왔다는 국회 청문회 이야기로 흘렀다가 최근 코로나로 어려워진 자영업자들의 줄이은 폐업까지 사회 전반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르내렸다.


다음 화제는 염색을 하는 아주머니가 사 온 달고나 라테였다. 달고나 라테 만드는 법에서 흑당 밀크티로 흐른 이야기는 카페인 중독으로 끝이 났다. 이야기는 두서없이 왔다 갔다 했고 모든 이야기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의 대화처럼 흥미진진했다. 미용실이니 만큼 머리숱과 머릿결이 화두가 되었다. 머릿결에 좋다는 제품추천받은 후 나의 풍성한 머리숱이  화에 올랐다. 사실은 머리숱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나의 콤플렉스이다. 나름 숱 많은 머리를 찰랑거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며 파마를 한 지 이십여 년이다. 다들 숱 많은 게 좋다고 나이 들면 알게 될 거라며 마무리되니 그러려니 한다. 다들 좋은 거라니, 좋은 걸 테다. 한결같이 아주 꼬꼬마 시절부터 나의 머리카락은 두껍고 풍성해서 미용사의 단골 화젯거리가 되었다. 사람의 최대 머리카락 개수가 2만 개라면 내 머리카락 개수가 그럴 거라는 미용사의 푸념 아닌 푸념을 짧은 한숨과 함께 들었을 때는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내 머리숱이 부끄러운 적도 있다. 미용사도 숱 많은 내 머리를 손질하려니 힘이 들어서 그런 말 한 것일 테지 싶다. 이런 잡다한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 동네 미용실이 좋아지는 것은 나도 나이 어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창문 바깥을 바라보면서 어느덧 단풍이 들어간다며 세월이 아쉽다고 말하는 미용사와 염색을 마치지 않은 아주머니께 인사하고 나는 미용실을 나섰다. 왠지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 진채로, 방금 한 머리를 휘날리는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면서.

가을의 태양빛이 감나무의 홍시처럼 여물어 노을과 같이 번지던  날,  나는 동네 미용실에서  사람 사는 내음에 실로 오랜만에 행복해지고 말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받기도 한다. 친함이 없기에 오히려 더 솔직해지고 사심 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누군가에게 나의 힘듬을 얹고 싶지도 않고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은데 가슴은 답답한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날 미용실에서의 수다는 사적으로 친하지 않기에 얘기를 나누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 서로 훌훌 털어내기가 좋다. 적당한 간격이 있으니 지나치게 깊지 않고 툭툭 내 얘기도 얹어가며 맞장구치고 웃고 떠든다. 그런 와중에 나의 고민은 스르르 풀리고 만다. 동네 미용실은 내게 그런 위로와 치유의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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