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로소 Jun 19. 2020

아버지와 낚시

아버지와 낚시

                                                                     최정미

  열두세 살 즈음, 아버지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힘없이 드리워진 낚싯대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나들이 겸 따라나섰고 해가 내리쬐는 풀밭과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그저 자연에서 뛰노는 맛으로 따라다니던 참이었다.

  내게는 늘 따뜻하게만, 듬직하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가슴속의 울분과 한, 깊은 슬픔과 위로가 있던 낚시 길이었다는 것을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취미라고만 여겼다. 낚시 때문에 어머니와 많이 다투면서도 퇴근 후 또는 주말마다 몰래 그렇게 낚시를 다니시던 아버지를 한참 나이가 든 후 이해하게 되었다.

  낚시는 참으로 나에게는 지루한 취미였다. 기다란 낚싯대를 꺼내어 하나하나 줄을 맞추고 찌를 끼우고 하는 과정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상당한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떡밥은 물가의 물을 담아 와 손으로 조물조물 뭉치는데 재미있어 보여 우리 남매가 하겠다고 하면 내주셨다. 조물 거리며 쥐똥 만하게 뭉치고 나면 손에서는 쥐포 냄새 같은 게 비릿하게 났다.    

  떡밥을 끼우고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기다림의 시간이다. 찌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동작이 고기가 문 건지, 찌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어서 낚싯대를 채어 봐도 떡밥만 날아가 있기 일쑤였다. 계속 떡밥을 새로 끼우고 또 끼우고 하다 보면 진즉에 낚시에 흥미는 떨어지고 기다려도 물고기는 잡히지 않아 체념하는 상태가 된다.

  낚시에 흥미를 잃은 나와 동생은 주변을 배회하며 잠자리도 잡고 땅도 파고 할 일없이 돌아다니다 간식거리를 먹기도 하며 한참을 노닐다 다시 낚시터로 갔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고요한 물결만 바라보고 계셨다.

  가끔 우리의 버려둔 낚싯대에 멍청한 고기가 잡혀 있는 재수도 있었다. 그렇게 세월을 낚으러 다니신 것인지, 바람을 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아버지의 낚시 사랑은 거의 이십 년이 넘게 계속되어 갔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자 예쁜 손주와 함께 낚시를 가고 싶은 아버지는 어린이용 낚싯대까지 마련하셨다. 아버지의 낚시 사랑은 이를 데 없이 오래되었다. 남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낚시를 같이 다녀서인지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아버지와 대화를 곧잘 나누곤 해서 아버지의 낚시가 꽤 좋은 취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 물가에 앉아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하시며 앉아 계셨을까. 지금 내가 그 물가에 앉아 말없이 찌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사고로 불편해진 손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상심과 절망에 빠지셨던 아버지는 낚시터에 낚시를 하러 가신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많으셨던 것 같다. 옆에 계시던 나이 든 할아버지께서 낚시를 권하셨는데 손이 불편해서 못한다고 했더니 그분이 낚시에 그게 무슨 대수냐며 호통을 치시고는 낚싯대를 하나 건네고 낚시 법을 가르쳐 주시더란다. 그게 아버지가 처음 낚시를 취미로 시작한 계기였다고 한다.

  자신의 아픈 몸과 마음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마흔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지켜야 할 가족이 있어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마흔의 나이가 되어보니 마흔이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앞으로의 나날들이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싶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터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늘 긍정적이시고, 활달하신 데다 자식들에게도 자상하셔서 아픈 속내까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자랐다. 너무나 가정적이셔서 다른 아버지들도 다들 그런 줄 알면서 살았다. 마흔이 되어서야 여러 시련 속에서도 늘 최선을 다하시며 가족을 사랑해주셨던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든 날이 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보고 자라온 덕분이다. 아버지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의 그 듬직했던 등이 이제는 많이 여위셨다. 나는 그 커다란 아버지의 등만큼 사랑을 받기만 했지 아버지에게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건장한 체격과 소탈한 성격으로 자신감이 넘치시던 아버지는 장애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을 텐데도 묵묵히 버티고 견디어내셨다. 하지만 점점 소심해지시고 자신 없어하시기도 했다. 아직도 장애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에는 많기 때문에 내 졸업식에도 결혼식에도 아버지는 손을 감추셨다. 전혀 아무렇지 않다며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딸에게 혹 폐가 될까 싶으셨는지 아버지는 늘 손을 감추셨다. 나는 자신 없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많이도 속상했다.

  최근 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시며 봉사를 다니신다. 아버지의 꿈은 아나운서였고 가수였다. 나이가 드셨는데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래 대회도 나가시고 상도 타서 자랑도 하신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참으로 기뻤다. 아버지는 원래 노래도 잘하고 멋진 분이셨다. 다행히 늦은 감이 있지만 아버지의 삶을 찾아가시는 것 같아 내심 자랑스럽기도 하다.

  요즈음은 자식들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으신지 아버지는 계속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때때로 장단을 맞추다가도 지루하기도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모습에 귀담아듣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아버지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이었는데…….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도 우산 끝 빗방울은 방울방울 떨어져 동그라미가 되어간다. 나에게 아버지는 우산과도 같은 분이다. 세찬 비바람도 막아주고 내 마음에 동글동글 동그라미를 많이도 만들어주셨다. 내가 과연 나의 아이에게도 우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와 낚시 다녔을 때 이야기도 하고, 매운탕도 함께 끓여 먹으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셔도 잘 들어드리고 아버지의 꿈을 늘 응원한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예전에 나 어릴 적 아버지가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달의 토끼를 보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