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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Oct 30. 2020

여수 버스

여수 버스


              최정미


여수의 버스는 바다를 끼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정류장을 스치듯 달리는 여수의 어느 시내버스에 앉아 버스가 데려가는 대로 앉아 있었다.

아이와 둘이 올라 탄 버스 안에는 한참을 지나도 우리 둘만 앉아 있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느껴지는 한낮이었지만 여름철 문명의 이기, 에어컨은 틀어져 있지 않았다. 버스 안은 말 그대로 너무 더워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버스가 달리면 바닷바람이 제법 시원했는데 창 밖으로 바람을 맞는 그 느낌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얼핏 운전석을 살피니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운전수는 운전석 창문을 활짝 열고 그대로 달리고 있으신지라 손님이 달랑 두 명인데 에어컨을 틀어 달라 말하기도 미안했고 창문을 열고 달리는 기분도 나름 새로워서 그냥 이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거미줄이 드리운 낡은 의자가 있던 이름 모를 바닷가 정류장에서 탄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바닷가를 끼고 달리는 여수의 버스에서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을 맞았다. 굽이굽이 푸르른 들과 산을 지날 때는 흙내음 담은 들바람, 풀내음을 담은 산바람을 맞았다. 그러다가 도심으로 들어서면 버스는 이따금 한두 명의 손님을 태우러 멈춰 섰는데 그럴 때마다 버스 안은 후끈 더웠다. 달리면 그럭저럭 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는데 멈추면 사우나 같은 찜통더위가 몰려들곤 했다. 

 여수에 도착했던 첫날에 비하면 여수의 습한 더위에는 익숙해져서 처음에는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아 다소 불만스럽기도 했던 이 버스 여행이 나는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배낭과 작은 가방은 의자 한 구석에 밀어 넣고 아이와 꼭 붙어 앉아 있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가 넉넉하여 아이는 아이대로 앉고 나는 나대로 맞은편에 앉아 바다의 풍경과 관광지를 보며 바다의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진남관이라는 여수의 명소를 향해 가는 버스였는데 진남관 쪽은 이순신 광장 등이 있는 중심가가 있는 곳이었다.   이 버스는 여수의 바닷가 끝에서 출발해서 여수의 곳곳을 거의 돌고 도는 노선이었다. 여수터미널, 전남대학교, 여수여고, 시장 등을 거쳐 진남관에 도착하는 코스여서 덕분에 여수의 사람 냄새나는 곳들을 눈으로 휘휘 둘러볼 수 있었다. 옛날 기차역인 여천역 근방의 논밭이 나오니 영락없는 시골스러운 풍경에 붉은 황토 빛 흙이 창밖을 스쳐 지나가고 산 아래에 있는 전남대학교를 달릴 무렵에는 싱그러운 산 내음이 솔솔 풍겨오며 정겨운 산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날 즈음에는 여수여고가 나오고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라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목적지인 진남관에 도착하여 아이와 서둘러 내렸다. 버스를 타고 그 많은 곳을 누비고 내린 시간이 어제 바닷가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간 시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내리고 나서 한참을 웃었다. 바람을 싣고 달린 버스가 거의 택시 수준으로 신나게 달렸던 것이다. 

전라도의 남쪽 끝 여수를 아이와 같이 가기로 한 날, KTX에서 내리자마자 여수의 습하고 더운 기운이 온몸에 느껴지자 잠시 후회도 했었는데 여수는 시간마다 또는 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처음 간 오동도는 아기자기했지만 숨도 쉴 수 없게 더웠고 그 더위를 피하듯 배고픔을 달랠 겸 들어간 저렴한 식당에서는 12첩 진수성찬이 나오는가 하면 거북선이 떡 하고 놓인 이순신 광장은 항구를 끼고 있어 한껏 낭만스러움이 느껴졌다. 거북선에 들어가 아이와 한참을 구경하고 나온 광장은 선선하니 여유가 있었다. 마침 여러 가지 연이 하늘 높이 띄워져 있어 아이는 여수 바닷바람을 타고 노는 연과 어울려 한참을 뛰놀았다. 오방색 커다란 연이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오르고 여수에 사는 까맣게 그을린 아이와 웃음을 머금은 푸른 옷의 아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연들의 끈을 잡고 유희를 즐겼다.

하늘이 거무스레 어두워질 무렵 바다 위를 건너는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낯선 이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가느다란 전기 끈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리는 빨간 하멜 등대와 아기자기한 벽화 그림이 그려진 여수의 저물어가는 도심지와 바다 위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난 후 깜깜한 밤이 되어버린 여수는 어느덧 알록달록한 색깔로 변해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니 아스라한 불빛이 창밖의 검은 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바다 위 유람선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 지라 때마침 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지친 얼굴 하나 없이 케이블카에서 내린 이들은 모두 아이처럼 불꽃놀이를 더 구경하려고 밤하늘을 그리도 한참 바라보았다. 

 여수를 떠나던 날 여수의 아쿠아리움에서 우리는 하얀 고래 벨루가를 만났고 인어 이야기를 들었다. KTX역으로 가기 위해 나선 낮의 뜨거움이 물러간 여수의 엑스포 길은 하얀 지붕이 가득 늘어선 호젓한 거리가 상당히 운치 있었다. 파아란 하늘과 동동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여기저기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이제는 익숙해진 바닷바람을 타고 깊은 푸른빛을 지닌 바다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저만치 항구에는 떠나지 못한 배들이 물결 위에 서서 평화롭게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기대와 설렘, 걱정을 뒤로하고 떠났던 여수 여행.

먼 먼 바닷가, 거미줄을 가둔 채 외로이 서 있는 하늘색 바닷가 정류장에 아이와 나는 다음 여행을 위해 서 있었고 여수의 버스는 말없이 우리를 태우고 달릴 채비를 했다. 에어컨이 켜진 차로 편히 오고 갔으면 몰랐을 여수 버스에서 볼을 맞대어 만난 바닷바람은 놀라우리만치 몽환적으로 나를 바다의 풍경 속으로 데려갔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들판으로 산으로 도시로 정신없이 데려간 버스 여행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만난다. 여수도 내가 마음을 열자 속살을 보여주며 맞이해 주었다. 나를 깨우는 것들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먼 남쪽 지방의 이국적인 어여쁜 꽃에도 먼 항구의 배에도 나의 마음길이 열려 있으면 그저 이 곳이, 이 시간이 푸르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내가 있는 곳의 시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간과도 같이 때로는 예상치 못하게 흐를지라도 그로 인해 ‘인생길이 나에게  매일 다른 수많은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마주하는 일상의 평온한 몸짓들과 푸른 녹음을 뚫고 들려오는 창 밖의 매미 소리에도 어여쁨이 있다. 지금 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중에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은 시간을 마주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눈을 잠시나마 빌려주는가 보다. 타성에 젖은 일상은 현재를 놓치게 하기 쉬우나 색다른 장소에서의 현재는 면면이 새로이 느껴지기 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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