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에서 내린 아메리카노나 카페 라테를 사 마시는 내게 시아버지께서 맥심을 먹지 비싼 커피를 사 마신다며 한 말씀하셨다. 술도 담배도 못하고 다른 취미도 없는 내게 당시 커피는 유일한 기호 식품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유일한 쉼이었다. 카페라테의 진한 풍미는 정말 몇 분이나마 하루의 시름과 힘듦을 잊게 해 주었다. 지금도 커피와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때는 육아로 지쳐 더 힘든 시기였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께 질문을 드렸다.
"아버님, 저는 술을 못합니다만 아버님 양주와 소주가 다르지요?"
"다르지."
"저한테 커피가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 한 번씩 커피숍을 가도 별 말이 없으셨다. 어차피 생활비도 넉넉지 않아 주로 커피머신으로 내려 마셨고 정말 바람 쐬고 싶을 때 커피숍에 갔다. 유일한 낙이자 위로였다.
k강사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내며 인기를 끌었다. 나는 그가 용기 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고 마음공부를 많이 한 듯 따뜻한 위로를 주었다.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대변해주기도 했다. 누나들이 많아서인지 여자의 마음도 잘 알았다. 인간대 인간으로 보면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는 걸까.
그는 아줌마들을 울리고 웃겼다. 무대에서 춤도 추고 혼도 내고 그러다 유머로 승화시키는 그의 유튜브를 한창 많이 보았다. 그렇게 인기를 얻은 그는 공중파 tv에 나온다. 여전히 그는 소통과 위로, 공감으로 대중을 울리고 웃긴다. 요즘의 그는 뭔가 안정되어 보인다. 나이로 인한 성숙함일까. 처음 강연을 했을 때가 더 젊고 잘 생겼지만 이제 중년이 된 그의 이해와 원숙함이 더 멋지게 느껴진다.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가정사를 오픈하면서까지 그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돈도 번다. 어쩌면 공인인 연예인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도 그 사람들로 인해 또는 그의 강의로 인해 위안받았기를 바라본다. 여전히 그의 강의는 나를 울고 웃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마음도 더욱 치유되었으면 한다.
타인과 교류하며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누는 관계에서는 늘 슬픔은 반이 되고 기쁨은 배가 된다.
비교와 시기, 질투가 있는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슬픔은 약점이 되고 기쁨은 시기와 질투로 돌아오니 말조심해야 했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예전에 울고 웃던 관계가 불편하게 삐그덕 거린다.
이제 인연이 다 된 걸까... 뒤돌아서면 씁쓸한 관계가 늘어난다.
일 년에 한 번 연락하는 친구가 더 오래가기도 한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생 엄마라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바쁜 일상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 생각나서 연락해 볼까 고민했다는 그녀의 말을 믿는다. 자신이 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고. 무례보다는 배려가 백 번 나았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 주변 사람들 얘기만 듣고도 그런 것을 어찌 알았던 것일까. 자꾸 선을 넘으며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다른 엄마들보다 예의가 있고 배려해 준 마음이 참 고마웠다.
연말이라 잘 지내냐고 건 전화 통화가 오랜만에 회포 풀듯이 길어졌다. 우리 살아온 고만고만 이야기는 늘 그렇듯이 가족 얘기, 살아온 얘기들로 이어졌다. 근처 오면 커피 한 잔 하자고 끝맺는 통화 끝에는 쓴 맛이 없다.
아무리 긴 대화를 나눠도 쓴 맛이 없어야, 텁텁한 후회가 남지 않아야 좋다.
생일선물로 베를린에서 왔다는 원두커피를 받았다. 텁텁하지도 않고 쓴 맛이 없고 가벼운 깃털처럼 보드라운 여운이 있다. 초콜릿 향과 과일향이 스치듯 남는다. 본 고장에 가서 마셔보고 싶을 정도의 커피 맛이다.
나이 들수록 질 좋은 커피처럼 여운만 남는 그런 관계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