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종교가 없어.
종교를 가지기가 쉽지 않아.
다들 죽기 전엔 종교를 찾는다는데 그때가 되면 달라지려나?
어릴 때 오빠랑 교회로 새벽기도를 갔던 기억이나.
동전처럼 생긴 달란트라는 걸 모으면 나중에 그걸로 교회 행사에서 물건을 살 수 있대서.
새벽에 어린 꼬맹이 둘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갔지.
엄마는 딱히 안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참 고마운 일이야.
겨울엔 농사일이 많이 없으니까. 엄마도 정선 시내에 유일하게 하나 있던 성당에 다녔어.
나도 종종 엄마를 따라가곤 했는데 덕분에 마리아라는 세례명도 받았지.
나쁘지 않았어. 사람들이 엄마를 윤수산나 씨 하고 부를 땐 사실 조금 멋져 보였거든. 엄마가 그렇게 세련된 이름으로 불리다니 말이야.
내가 교회에 나간다는 소문은 성당에도 퍼졌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진 않았어.
다들 그냥 웃고 말았지.
지금은 교회에도 성당에도 나가지 않아.
종교라곤 일 년 중 두 번 시어머니를 따라 명절제사를 지내러 가는 원불교 정도지.
그렇다고 원불교를 내 종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혹시나 괜한 기대를 하실까 어머니께도 미리 말씀드렸어.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가는 거라고. 그뿐이라고 말이야.
그 말에 조금 서운해하는 듯하셨지만 다행히 더 얘기하진 않으셨어. 그 또한 고마운 일이지.
나에게 종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이었어.
그저 누군가의 종교활동을 구경하러 가는 느낌이었지.
왜 그렇게 종교를 갖는 게 어려웠을까?
어느 순간 알겠더라. 왜 어려웠는지.
종교가 있다는 건 어딘가 든든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데
다들 종교가 없는 나보다 특별히 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
몇몇은 불행해 보이기도 했지. 엄마가 그중 한 사람이었고.
종교를 가진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닌가 보다 싶었던 것 같아.
물론 지금은 TV나 유튜브에서 종교를 가져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봐.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 주변사람이 아니니까.
또 모르지, 저 사람을 보니 나도 그 종교를 가지고 싶다 할 일이 생길지도.
정말로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 중이야.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불행했던 거야?
엄마의 하나님은 왜 한 번도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을까?
하나님을 믿었던 건 맞는 걸까?
돌아보면 엄마는 그냥 엄마의 불안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 같아.
집에 스님이 찾아오면 쌀을 바가지 가득 퍼주던 엄마였잖아.
동네 오래된 나무 앞 성황당 제사도 빠지지 않았어.
점집에 전화를 하며 전화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지.
엄마는 뭐가 그렇게 두려워?
사는 거? 죽는 거?
지금 아픈 엄마를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엄마, 나도 두려워. 죽음이.
그런데 내 죽음은 별로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지.
내가 건강하려 애쓰는 것도 나의 죽음에 슬퍼할 가족들을 떠올리면 그게 너무 슬퍼서야.
그래서 건강해야겠다 생각해.
엄마가 죽는다면?
혹시나 엄마가 이대로 회복하지 못해도 많이 울 거야.
아마 얼마 간은 꽤 힘든 시간을 보내겠지.
그런데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사라져서는 아닌 것 같아.
그냥 한 사람의 인생이 가련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는 한 여자의 삶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을까. 여기서 ‘그렇게’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야.
늘 불행해 보여서. 마치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사는 엄마였으니까.
엄마, 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떠올릴 행복한 장면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와 밥을 먹고 TV를 보고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이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됐으면 해.
그런 기억들만으로도 이곳이 지옥이 아니었으면 하거든.
내 눈에 엄마는 늘 지옥을 사는 사람 같았어.
여전히 엄마는 지금의 삶이 지옥이야? 엄마가 찾는 것은 이곳엔 없는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어. 바라던 무언가가 이루어져도 또 다른 불행을 찾던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뭘 가지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내가 나로서 충분히 행복하다고 해도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불행해했잖아.
그 기도는 나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엄마에게 솔직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지만
지금도 궁금해.
엄마의 기도 너머엔 뭐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