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새벽

시간과 음악이 있는 공간, 올드 앤 와이즈

by 시선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 여태 서촌이다. 예진과 정민 그리고 준모를 만나 술을 먹는 게 오랜만이다. 밤을 꼴딱 새울 수 있을 것 같다. 주는 잔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먹으니 두 볼이 뜨겁다.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아 나가서 좀 걷자고 한다. 우리는 통인동에서 경복궁 쪽으로 걸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정신이 맑아진다. 대로변을 따라 걷는데 얼핏 김광석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골목 어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스피커에서였다. 스피커 꽁무니의 연결선을 따라가 보니 지하에 자그마한 엘피바가 있다.
‘시간과 음악이 있는 공간, 올드앤와이즈’
우리는 그 간판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 네 테이블, 오른쪽으로 네 테이블, 정면에 바 테이블 하나, 그리고 술 냉장고 두어 개가 전부다. 오롯이 노래 소리만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바 테이블 안쪽에서는 한 남자가 엘피판을 만지고 있다. 주인장으로 보인다. 셔츠와 청바지를 입어 말끔한 모습이다. 그의 뒤로는 엘피판들이 빼곡하다.
우리는 빈 자리에 앉아 먹태와 맥주를 시킨다. 잠시 후 종업원이 테이블 위를 밝힐 작은 초를 건넨다. 테이블 위로 촛불이 켜진다. 곧이어 술과 안주가 나온다. 우리는 커다란 스피커 아래에서 노래를 들으며 차가운 맥주를 마신다.
바 테이블 앞에 메모지와 볼펜이 있다. 신청곡을 적어 내는 모양이다. 나는 그 하얀 메모지와 모나미 볼펜을 가져왔다. 작은 메모지 위에 네 명이 들러붙어 신청 곡을 적는다.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 나가 그것을 주인장에게 건넨다. 주인장은 신청 곡을 쓱 훑어보더니 거침없이 판 하나를 찾아 꺼낸다. 재생되던 노래가 끝나자 턴테이블에 판을 갈아 끼운다. ’타닥’ 하고 바늘을 내리자 ‘지지직’거리며 새로운 노래가 재생된다.
“내가 신청한 노래다.”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엘피판으로 80년대 노래를 들으니 시간을 여행하는 듯한 오묘한 감정이 든다. 노래의 클라이맥스에서 친구들과 나는 눈을 마주친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껏 노래를 따라 부른다. 곧이어 메아리치듯 옆 테이블의 회사원들도 따라 부른다. 결국 모두가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번>을 ‘떼창’한다. 생면 부지한 사람들이 노래로 하나가 된다.


새벽 한 시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우리 테이블만 남아 있다. 나오는 노래마다 손을 들고 노래하는 우리를 보고 주인장은 연신 웃는다.
“젊은이들이 옛 노래를 다 좋아하네, 어디서 왔어?”
용인과 안산 그리고 김포에서 왔다는 우리를 보고 그가 놀란다. 그리곤 여기까지 와주어 고맙다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영업시간은 종료됐지만 놀고 싶은 대로 놀다 가라고 말한다. 이제부터 우리 테이블만을 위한 선곡이 시작된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가 나오고 주인장은 일어나 진로 소주를 한 병을 꺼낸다. 이젠 주인장도 ‘퇴근’인 것 같다. 곧이어 그와 한 상에 둘러앉았다. ‘수줍어서 말 못했나 내가 싫어 말 안 했나 지금도 난 알 수 없어요’ 가사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 뒤로도 유재하, 김현철, 동물원, 노고지리와 같은 80년대 가수 음악이 흘렀다. 우리는 그 시절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꽤 죽이 잘 맞았다.
새벽 두 시다, 주인장은 이제 엘피판에서 손을 떼고 멜론을 통해 음악을 자동재생 시킨다.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 되려는 듯 하다. 음악을 매개로 우리의 대화는 더 깊어진다.
한편, 주인장은 ‘좁은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이야기한다.
“관계에 대해서? 난 많이 필요 없다고 봐. 천명 중 한 명이라도 진정한 한 명이 있으면 돼. 살면서 그런 인연에 집중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대들도 피곤하게 인간관계를 확장하려 하지는 마. 일 년에 한번이 됐든 간에 자연스러운 인연들과 대화를 하고 그렇게 행복해지라고.”
그의 말이 맞다. 열 번을 만나도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이 있고, 한번을 봤는데도 열 번을 본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어진 인연과 보내는 ‘밀도 있는 시간’ 아닐까 생각한다.
“통하는 사람 만나기란 쉽지 않지. 그렇다고 억지로 찾을 필요는 없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억지로 인연을 찾다 보면 항상 못마땅해지기 마련이거든. 자연스러운 인연은 몇 년 만에 나타나도 좋기만 하다니까.”
나는 문득 ‘누가 이 새벽에 종로에서, 청춘과 황혼이 마주 앉아 노래를 듣고 대화를 나누겠는가’ 생각한다. 그가 말한 대로 이런 게 자연스러운 인연인가 싶다.
“내가 그대들보다는 좀 더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무슨 이야기가 됐든 간에 ‘이건 좀 궁금하다.’ 하고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언제든 오라고. 나도 마찬가지로 칠팔십 나이 먹은 사람이랑 이야기해보면 그래. 내가 거의 십 년 뒤에 깨달을 이야기를 어떤 사람 때문에 지금 깨달은 걸 수도 있다니까? 그런 사람 만나면 참 고맙거든.”
그러면서 주인장은 인생을 시험에 비유했다. 연장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참고서’ 하나를 손에 쥐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향해 간다. 우리는 이번엔 ‘좋아하는 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란 쉽지 않겠죠?”
나의 물음에 주인장은 가슴팍에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 운을 띄운다.
“힘들지. 나도 평일에 손님이 없을 때면 ‘힘들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 그렇지만 혼자 벽보고 있더라도, 혼자 천장만 보고 있더라도 ‘이게 훨씬 낫다’라는 생각을 해.”

생각을 곱씹으며 천천히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굳은 심지 같은 것이 보인다. 그가 이어 말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수도 없이 흔들려. 그런데 그중에서 중요한 건 조금 ‘덜’ 흔들리는 것, 그걸 찾아서 가는 거야. 그래야 다른 사람들보다 ‘덜’ 힘들 수 있어. 결국 그게 강해지는 법이거든.”
‘덜’ 흔들리는 것도 강해지는 방법이라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는다. 나는 이 시간을 책 귀퉁이 접듯 표시하고 싶어진다. 이 새벽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는 우리에게 값을 받지 않을테니 맥주를 하나씩 더 고르라고 한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술밖에 없다고 말이다.
20대와 50대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불현듯 그가 ‘어른 친구’ 같이 느껴진다.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새벽녘 아직 거무스르한 거리엔 우리 뿐이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택시를 잡는다.
“또 올게요.”
창문을 내리고 우리를 마중하는 그에게 다음을 기약한다.
서촌의 새벽, 어두운 거리에서 택시가 출발한다.

2019.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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