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시작과 끝
우리는 하루 두 번의 식사를 함께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아침 식사로 하루를 함께 시작하며 저녁 식사로 하루를 함께 마무리한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하는 하루 두 번의 식사이다.
주방에는 한가운데 네모난 좌식 원목 테이블이 있다.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다. 열두 시 방향으로 엄마 아빠가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나와 할머니가 앉는다. 우리는 매일 그 자리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아침저녁을 함께했다. 할머니와 아빠는 아침을 꼭 드셨다. 엄마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어린 나는 귀찮아도 꾸역꾸역 아침밥을 먹고 초등학교에 갔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해 질 무렵이 되면 으레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두 번의 식사가 사라졌다.
엄마 아빠가 치킨 가게를 차리고 나서다. 그 무렵 나는 고 3이 되었고 기숙사 생활을 했다. 엄마 아빠는 오후 3시에 출근해서 매일 새벽 2시에 퇴근을 했다. 그러고는 쓰러지듯 잠을 잤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아침을 먹지 않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는 치킨 집 딸이 되어 좋았다. 안 그래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엄마 아빠가 치킨 집을 한다니, 그저 좋았다.
어느 날은 기숙사에서 치킨이 먹고 싶어 아빠에게 ‘파닭’이라는 문자 한 통을 보낸 적 있다. 아빠는 금세 배달용 시티 오토바이를 타고 생활관 후문 논길을 달려왔다. 그러고는 철조망으로 된 후문 틈 사이로 검은 봉지를 밀어 넣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사감 선생님 몰래 방에 들어가 커튼 뒤로 숨겼다. 곧이어 점호가 시작되었고, 끝난 뒤에는 불을 끄고 자는 것처럼 했다. 사감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끊길 때쯤 커튼 뒤에 숨겨 둔 파닭을 꺼냈다. 방 안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옆방 친구들이 손톱으로 문을 긁으며 열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문을 여니 문 앞으로 서너 명의 아이들이 줄을 서있다. 네가 먼저니 내가 먼저니 키득거리며 어두운 방 앞에 입을 벌리고 서있다.
“웃지 마. 진짜 걸리면 죽음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서있던 아이들에게 순살 파닭을 한입 가득 넣어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다. 엄마 아빠가 저녁 시간에 맞춰 나와 친구들을 가게로 불렀다. 친구 너 다섯 명과 가게로 가니 엄마는 생일 파티를 할 것처럼 테이블 두 개를 하나로 붙여놓고 상을 차려놨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갖가지 치킨을 내왔다. 내가 좋아하는 파닭에 간장치킨, 그리고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이었다.
“그렇게 좋으니? 이거라도 해줄 수 있어 다행이네.”
엄마랑 아빠가 무아지경 속에 치킨을 먹는 우리를 보고 그렇게 말했었다.
다음 해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친구와 안양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고 3 기숙사 생활 때보다 더 가족을 못 보게 되었다. 밤 낮이 바뀐 엄마 아빠와 일주일에 한 번 식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치킨 집 딸인 게 좋았다. 엄마 집에 가는 날이면 공짜로 치킨을 먹을 수 있고 자취방에 돌아가는 날이면 공짜로 치킨을 튀겨갈 수 있으니 말이다.
엄마 아빠가 치킨 집을 차린 지 5년이 되던 해 나는 취직을 했다. 안양에 있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가족이 있는 용인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용인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을 했다. 여전히 새벽 퇴근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아침 밥 할 여유는 없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아침밥을 못해주는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엄마가 자느라고 아침 해주기가 힘드네. 화장대에 있는 바구니에 귤 채워놨어. 아침에 화장하면서 귤이라도 먹고 가. 회사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뭐라도 꼭 사서 들어가고.”
버스를 놓칠까 재빨리 신발을 신던 나는 아침이 대수인가 싶었다. 눈을 비비며 잠이 덜 깨 말하는 엄마에게 대충 알겠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편의점 앞을 지나쳐 빈속으로 출근했다.
그래도 저녁은 잘 먹고 다닌 편이었다. 퇴근을 하고 엄마 아빠의 치킨 가게로 가면, 엄마는 밥을 짓고 아빠는 계란말이를 해서 케찹으로 하트를 그려놓고 나를 기다렸다. 아침은 챙겨주지 못해도 그렇게 해서 저녁을 꼭 챙겨주던 엄마 아빠였다.
“소희야. 엄마 아빠가 정말 미안한데 오백만 원만 꿔 줄 수 있어?”
직장 생활을 한 지 고작 2년째였다. 엄마 아빠가 나를 가게 테이블에 앉히고 운을 뗐다. 그리고 대충 치킨 집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치킨 프랜차이즈들에 손님을 뺏기고 매출이 떨어지면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렵게 입을 뗐을 엄마 아빠의 앞에서 나는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자리를 떴다.
그 무렵은 내가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년 내일 채움 공제’ 만기가 되던 해였다. 2년간 중소기업에 다니며 월 12만 5천 원씩 적립하면 원금 300만 원과 만기 공제금 1200만 원, 총 1600만 원을 함께 수령할 수 있는 제도였다. 내가 직장 생활을 견딘 팔 할이 그 만기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 돈을 받으면 ‘나중에 시집갈 때 보태 써야지’ 했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그 돈에서 오백만 원을 꿔 달란다. 말이 꿔주는 거지 나를 키워준 엄마 아빠에게 어떻게 그 돈을 돌려받나 싶었다. 나는 오백만 원을 줄 생각으로 고민을 했다. 그러다 한편으로 억울했다.
'왜 하필 나일까, 오빠도 있는데.'
며칠 뒤 아빠는 나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말이다. 아빠는 도배 일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새 학원도 등록했다. 아빠는 석 달만에 자격증을 따왔다. 아빠에겐 매일이 도배 연습이었다. 이사 가버린 친구의 빈 집에 가서 갖가지 방법으로 도배 연습을 했다. 집에 돌아오면 씻고 눕자마자 유튜브로 공부를 했으며, 다음날이면 빈 집에 찾아가 전날 본 것을 실전에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아빠에게 세 장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아빠의 열정이 멋있습니다. 비로소 꿈을 찾은 아빠를 나는 응원합니다.’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빠의 계좌로 오백만 원을 보냈다.
아빠는 모자랐던 돈이 채워지자 치킨 가게를 닫고 자그마한 인테리어 가게를 열었다. 그 무렵 나도 퇴사를 하고 집 앞에 있는 빵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두 번의 식사가 찾아왔다.
엄마 아빠는 보통 사람들처럼 낮에 일하고 밤에 잤다. 아빠는 이제 막 가게를 차렸지만 제법 일이 들어왔다. 엄마도 치킨 기름 냄새 맡는 것보다 아빠 사무실을 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예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국을 끓인다. 어렸을 때 교복에 냄새가 밸까 싫어하던 된장국 냄새가 이젠 좋기만 하다. 아침이면 억지로 먹던 콩나물국도 이젠 시원하고 좋다.
우리는 다시 저녁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4시 정도에 퇴근해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온다. 나의 퇴근길에 멀리 보이는 집은 항상 주방에 불이 켜져 있다. 불 켜진 주방은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엄마. 밥 줘!”
집에 오자마자 현관 앞에 외투를 벗어 놓고 주방으로 향한다. 고기를 볶고 진미채, 시금치나물, 무생채 같은 반찬을 하느라 바쁜 엄마 옆에서 접시에 반찬을 담는다. 그러다 보면 곧 아빠가 검은 비닐봉지에 막걸리 한 통을 사들고 퇴근한다. 방에 계신 할머니를 부르고 곧이어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는다.
아침에 본 가족의 얼굴이 저녁이 되어도 무탈하다. 저녁에 마주한 식구들의 얼굴이 새삼 반가워진다.
아빠는 도배 풀이 묻은 옷을 하고서 막걸리 잔부터 채운다. 나는 아빠 잔에 물 잔을 부딪치며 말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