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머니
우리 집은 논과 산이 보이는 시골 마을에 있다. 파란색 지붕에 초록색 대문으로 된 시골집이다. 집 앞에는 흙마당이 있고 주변으로는 이웃집이 서너 채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는 이 집에서 증조할머니, 친할머니, 엄마, 아빠, 오빠, 나까지 6명이 살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증조할머니와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이 사진은 내가 유일하게 두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아래에는 희미하게 1995년 9월 8일이 찍혀있다. 고부 사이인 두 할머니는 여름이면 집 앞마당에 나가 고추를 말렸다. 두 살인 나는 두 할머니 가운데 있다. 아마도 친할머니와 증조할머니 가운데에서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있는 듯하다. 친할머니는 어린 손녀가 귀여웠는지 고추를 다듬다 말고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증조할머니는 바닥을 보며 고추를 다듬고 있지만 옆모습으로는 미소를 보이고 있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하얀 천을 두른 증조할머니를 껴안으며 울던 친할머니를 기억한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줄곧 친할머니 옆에 붙어있었다. 나는 매일 할머니 옆에서 잤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친할머니는 엄마 아빠를 대신해 어린 나를 먹이고 입혔다. 아침이면 할머니는 어린 나의 머리를 땋아줬고, 내가 아침밥을 먹기 싫다고 하면 간장에 밥을 비벼서라도 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보냈다. 유치원 때 나는 툭하면 수원에 있는 고모네 집을 가자고 할머니를 졸라댔다. 한 살 터울인 친척 언니와 놀고 싶어서였다.
“내가 너 데리고 버스 타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할머니는 나의 떼에 못 이겨 10번 시내버스를 탔다. 10번 시내버스는 우리 동네인 용인 백암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버스이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려 수원역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복잡한 수원역 로데오 거리를 이리저리 헤맸다. 할머니의 허리춤 정도였던 나는 복잡한 거리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할머니를 쫓아다녔다. 여자들의 큰 가방과 덩치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두 손을 뻗어 인파를 가르고 할머니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할머니는 길을 찾아 걷다가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할머니 꼭 붙들어 매.”
쿵쾅 거리는 음악 소리와 술집이 즐비한 번화가에서 할머니가 안 되겠는지 손을 뻗어 나를 낚아챘다. 복잡한 거리에서 나는 혹시라도 할머니를 놓칠까 할머니의 손을 꼭 붙들었다. 할머니의 손이 따듯하고 단단했다.
고등학생 즈음되었을 때는 이젠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일 년에 한두 번 어쩌다 수원 고모네 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달라진 거리와 변경된 노선 때문에 줄곧 불안해했다. 그런 할머니와 달리 나는 여유롭게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켠 뒤 버스 도착 정보를 봤다.
“할머니, 내가 크니까 이젠 할머니가 애기 같네.”
“그려. 할머니 이제 애기여.”
이제는 할머니가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일흔 넘은 할머니의 손이 차갑고 버석버석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할머니 방에서 자주 잤다. 내가 할머니의 방에서 자는 날이면 할머니는 나에게 푸념을 많이 했다. 대부분 할머니의 시집살이 이야기였다.
“내가 시집살이를 얼마나 한 사람인데, 니 증조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괴롭혔어. 나 애기 논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 겨울에 냇물에서 빨래를 시켰다. 그마저 빨리 안 해가면 모래바닥에 죄 집어던지고..”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할머니의 입이 여전히 삐죽거리는 걸 보니 그때 시집살이가 아직도 분한 것 같았다. 나는 잠이 올 때까지 할머니의 같은 말을 서너 번씩 듣고 있었다.
“할머니 나 이제 잘 거야. 그만해.”
“서러워서 그러지 서러워서..”
할머니는 말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나는 가족 중에서 할머니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아빠는 바빠서 예민하고 엄마는 할머니와 친하지 않다. 오빠는 장가가서 이젠 집에 없고, 할머니는 나밖에 없다. 그걸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할머니가 하는 푸념을 그냥 듣고 있다. 물론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점심밥을 먹다 또 할머니의 푸념을 들었다. 할머니는 내 점심밥을 차리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할머니가 쌀이 눌어붙은 밥솥을 가져와 숟가락으로 누룽지를 긁어모으며 말했다.
“그놈의 밥이 뭔지. 니 아빠 어려서 밖에 돌아다니길래 찾으러 나갔더니, 니 증조할머니가 밥 안 하고 마실 댕겨왔다고 나를 그렇게 패고…”
나는 속으로 ‘또 시작이다’ 생각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나 그때 마실 댕겨온거 아닌데…’라며 혼잣말을 했다. 나는 밥을 먹으며 쳐다보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 그러면서 할머니 괴롭히던 증조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왜 울었어?”
할머니가 긁어모은 밥알을 입에 대다 말고 말했다.
“그거야 이제 못 보니까 그랬지, 호랑이 같던 목소리 이제는 못 들으니까..”
할머니는 모질지 못한 사람 같았다. 하물며 며느리인 우리 엄마에게도 그랬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싫은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여린 사람이었다.
나는 일을 쉬는 날이나 주말이 되면 어릴 때처럼 할머니 방에서 잠을 잔다. 뜨끈한 온돌방에 누워 할머니 냄새를 맡으면서 말이다. 나에게 할머니 냄새는 사탕 향이 나는 흙집 냄새이다. 아랫목에 펼쳐진 이불속에 들어가면 따끈한 흙집 냄새와 머리 맡에 놓인 할머니의 사탕바구니에서 나는 달달한 냄새가 섞여 난다.
할머니 방에서 잘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주 깊게 잠이 든다. 그러다가 숨이 턱 막혀 일어나 보면 할머니는 무거운 목화솜 이불을 꺼내어 내 목까지 덮어두었다.
“할머니 숨 막혀.”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나 시집올 때 제일 좋은 거로다가 해온거여.”
할머니의 사랑이 목화솜 이불만큼이나 묵직하다.
얼마 전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할머니와 마당에 나가 눈을 쓸었다. 나는 빗자루를 가지고 양 옆을 휘저었다. 할머니는 그런 내 빗자루질이 답답했는지 뒤꼍에서 넉가래를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하는 거 아녀. 할머니 하는 거 봐봐.”
할머니는 초록색 넉가래를 가지고 쌓인 눈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고개를 들었다. 누빔 옷을 위아래로 입고 열심히 앞질러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할머니가 저만치 가있다가 뒤를 돌아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사이 내리던 눈이 할머니의 머리 위에 앉았다. 하얀 눈이 비춰 할머니의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할머니가 나를 보며 눈처럼 하얗게 웃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할머니가 사진처럼 나를 보며 웃고 있어 다행이다. 내가 세 살 일 때도, 그리고 스물일곱인 지금까지도 할머니가 내 곁에 있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