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와 미래

by 시선

동갑인 J와 알고 지낸 지 7년째다. 그는 나에게 오래 전 다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덤프트럭이 놓친 신발주머니를 줍고 있던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이를 덮쳤는데,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그 사고로 J는 어린 나이에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긴 수술을 해야 했다. 5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수술실로 들어가던 J는 산소 호흡기를 달기 전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 하나도 안 아프게 수술 잘해주세요.”

J는 퇴원하기 전까지 총 14번의 대수술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고등학생 때까지의 유년 시절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했다.

내가 J를 만난 건 스물한 살 때다. 그가 지독한 병원 생활을 마치고 멀쩡한 모습을 하고 나서였다.

여름이었다. J와 합정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도 음식점에서 카레를 먹고 나와 좀 걷는데, 그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해줬다. 그는 자신을 ‘체육 시간이면 스탠드에 앉아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라고 했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J는 이윽고 자신이 가진 몸의 상처에 대해 말했다.

‘14번의 대수술,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의 병원 생활, 휠체어, 우울증, 정신과 상담…’

자신의 아픔을 덤덤히 말하는 J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땅만 보았다. 그냥 걸었다. 그의 아픔을 가늠하지 못한 채 생경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가 미웠다.

나는 J와 다르게 딱히 할 말 없는 순탄한 유년 생활을 보냈다. 잘 먹고 잘 크는, 그냥 보통 아이였다.

뛰어노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 J라면, 나는 그의 시선 너머 뛰어놀고 있는 아이였다. 발이 묶인 그와 달리 나는 날개를 단 것처럼 자유로웠다.

몰랐다. 멀쩡히 걷던 그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가 있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몇 년 전만 해도 J는 오늘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내일보다는 오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J를 안지 삼 년 정도 되었을 때다. 나는 그에게 한 달 단위로 계획을 짜고 적금 통장을 만들어 돈을 모아야 한다고 했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나한테 없을 수도 있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낭비하긴 싫다.”

낭비,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낭비라니. 당황스러웠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워온 나에게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가 낯설었다. 나는 J를 나무랐다.

"오늘만 중요해? 미래를 생각해야지. 오늘만 보면 오늘처럼만 사는 거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돈을 모아야지."

가만히 듣던 J가 물었다.

“진짜 미래를 확신해?”

죽음에 가까워 본 적 있는 그가 물었다. 죽음 앞에서 일분일초를 잡고 견뎌내던 한 아이가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눈만 끔벅거렸다. J가 말했다.

“나는 그냥 오늘부터 잘 살고 싶다.”

커다란 사고 없이 평탄한 삶을 누린 나는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당연히 미래도 올 줄 알고 말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듯 침착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그의 앞에서 나는 오늘을 건너뛰어 겁도 없이 미래를 확신했다. 나는 그를 나무랄 자격이 없었다.

J는 느리지만 섬세하다. 그래서 빨리 지나치는 나와 달리 많은 것을 본다. 나는 그런 그가 답답해서 싫지만, 내가 지나치고 못 볼 것을 보게 해 주어 좋기도 하다.

그와 광장 시장을 갔다. 분명 그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 혼자 걷고 있다. 걸음이 빠른 나와 달리 그는 걸음이 느린 데다, 앞에 있는 횟집 수족관에서 생선들도 봐야 하고, 옆 골목에서 낮술 하는 아저씨들도 구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얼른 오지 않고 어딘가에 머물러있는 J를 보며 생각한다.

‘너는 참 볼 것도 많아서 먹을 것도 많겠다..’

나는 시장의 후미진 골목을 구경하고 나오던 J쪽으로 갔다. 그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어 보았다.

엄마 같은 여자가 빈대떡을 부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떡볶이 집 할머니가 느리게 걷는 나를 보고 들어오라 손짓했다. 생소한 표정을 한 관광객들이 그 앞을 지나쳤다. 곳곳에서 지지고 볶는 냄새가 올라왔다. 생기가 돌았다. 활기가 넘쳤다.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며 걸었다. 나는 J덕에 지금을, 그리고 오늘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J도 내덕에 시작한 게 있다. 저금이다.

삼 년 전쯤 그에게 언제 아플지도 모르는데 돈이 없어 죽고 싶냐는 말을 한 적 있다. 오늘만 보던 그도 속으론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금을 들었다. 그가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 J는 나보다 착실히 돈을 모으는 것 같다. 적금 자동이체 금액이 나보다 높으니 말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J와 현재와 미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 따지지 않는다. 나는 그를 따라 오늘을 들여다보고, 그는 나를 따라 내일을 그린다.이제는 그가 보던 현재도 내가 보는 미래도 우리에겐 모두 중요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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