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의 다른 말
아빠는 원하던 인테리어 가게를 차리기 전까진 인테리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었다. 아빠는 그동안 단순히 돈을 벌어왔고 그래서 때때론 무력했다.
아빠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다. 나무로 여러 조각상을 만드는 사람이고, 전기부터 보일러, 세탁기, 냉장고, 심지어 지붕까지, 모두 제 손으로 고칠 줄 아는 사람이다.
4년 전, 그런 아빠가 도배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했다. 치수를 재고, 재단하고, 모양을 맞춰 붙이고. 이건 도배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했다.
결국 아빠는 그 말을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자격증을 땄다. 속전속결로 인테리어 가게까지 냈다. 아빠의 무력한 모습이 사라졌다.
아빠의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는 엄마의 몫이 컸다. 아빠 곁에는 항상 엄마가 있었다. 아빠가 이런저런 가게를 차릴 때마다 엄마는 아빠 곁에서 늘 힘을 더했다. 그런 엄마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넌 결혼해서 남편이랑 절대 가게 같은 거 하지 마.”
엄마는 하루 종일 남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라고 했다. 각자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돌아와 집에서 마주하는 일상이 가장 나은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번엔 인테리어 가게였다. 이번에도 엄마는 아빠 곁이었다. 엄마는 이따금 아빠를 따라 도배 현장에 나가 옷에 풀을 묻히고 돌아왔다.
그놈의 밥. 가게를 차린 뒤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밥이었다. 아빠를 잘 해 먹여야겠다는 책임감이었다. 엄마는 매일 메뉴 선정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매일 저녁이면 힘든 일을 한 아빠를 위해 훌륭한 밥상을 차려냈다.
‘채소를 듬뿍 넣고 들들 볶은 돼지 두루치기, 한 시간 정도 푹 삶은 돼지 김치찜, 무와 바지락 그리고 미나리를 넣고 끓인 시원한 생태탕, 싱싱한 굴과 무를 넣은 굴밥…’
엄마의 메뉴는 고기에서부터 해산물까지 이것저것, 또 여러 가지였다.
오후 6시면 퇴근하는 아빠의 손에는 꼭 막걸리 한 통이 들려있었다. 아빠는 식탁에 앉자마자 사 온 막걸리를 통째로 휘휘 돌려 대접에 따라 마셨다. 그런 아빠 덕에 거의 매일 저녁 우리 집 식탁에는 시원한 막걸리가 함께였다.
엄마는 아빠가 저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만족해했다. 종종 "한 그릇만 더 줘”하는 아빠의 말에 토끼 눈을 하고 얼른 밥을 펐다. 아빠가 밥을 더 달라고 할 때면 엄마는 소복하게 푼 밥그릇을 아빠에게 건네고선 나에게 “너네 아빠 엄청 맛있나 보다”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빠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두 그릇째 밥을 먹던 아빠가 주어진 일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한 오늘이 만족스럽다고도 했다.
“일하고 오니 아주 꿀맛이네. 당신도 한잔해.”
엄마는 그런 아빠의 입 주변에 붙은 밥풀을 보고 웃었다. 밥풀이 묻은 지도 모르고 맛있게 밥을 먹는 아빠를 보고 엄마는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평소 막걸리는 배가 부르다며 잘 마시지 않던 엄마가 막걸리 한 잔을 받아 마셨다.
아빠는 우리에게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러 가자고 했다. 아빠는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을 맛있게 먹은 날이면 엄마와 나에게 이렇게 산책을 가자고 했었다. 기분이 좋은 아빠는 이렇게 우리와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저번에는 귀찮다고 했던 엄마가 오늘은 웬일인지 옷을 갈아입었다. 산책하러 갈 채비를 하는 엄마를 보고 나도 옷을 갈아입었다. 신발을 신고 강아지의 목줄에 산책 끈을 끼웠다. 나는 우리가 하는 산책이 일심동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 셋의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집 앞으로 길게 뻗은 소방도로로 시작해 산 둘레길을 지나 하천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자고 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소희야 아빠 쪽으로 와서 이 흙냄새 좀 맡아봐. 이게 진짜 좋은 흙이야.”
“와 찰흙 냄새다.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벌써 달래가 나왔네. 소희야 이것 봐봐. 이게 달래야.”
“그러네. 내가 좋아하는 달래네.”
강아지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앞서갔다. 나는 강아지를 따라 저만치 앞으로 걸었고, 이따금 뒤를 돌아볼 때면 엄마 아빠가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종종 엄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날 때마다 나도 웃었다.
오늘 아빠는 일을 하느라 힘들었고 엄마는 밥을 하느라 힘들었지만, 나는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주어졌고,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고, 또 이렇게 셋이 모여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상쾌한 저녁 공기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산책은 우리 가족의 무탈한 하루였다. 나는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둘이 보였다. 나는 함께 있는데도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둘에게 되돌아 가며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했다.
“둘이 보기 좋다.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엄마 아빠 곁에 없더라도 이렇게 엄마 아빠 둘이서 자주 산책해요. 그때는 아빠가 하고 싶다던 도배 학원도 차렸으면 좋겠어요. 허리도 아픈데 현장에 그만 나가고 말이에요.
어렸을 땐 죽을 때까지 엄마 아빠랑 살 거라고 했었는데, 그럴 순 없겠죠?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함께할 수 있을 때 산책 많이 해둬요. 오늘도 나와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주어 고맙습니다.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사랑해요.”
발걸음이 둘의 곁에 멈춰 섰다. 우리는 나란히 같은 곳을 보고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