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니까

by 시선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남자 친구는 말했다.

"크리스마스 날 와인 바에 가볼래?"

난 가격부터 물었다. 물어보나 마나 비쌀 것이고 가봤자 폼만 잡다 나올 게 뻔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일인당 팔 만원, 게다가 와인은 별도란다. 찾아보니 와인은 제일 저렴한 게 구만원이었다. 내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다. 나는 안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왜. 크리스마스잖아."

난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내는 재주가 없다. 얼마 전 보낸 남자 친구와의 기념일에도 나는 평소와 같이 만두집에 가자고 말했고, 그곳에서 군만두와 칭다오 맥주를 배부르게 먹었다.

그런 나에 비해 남자 친구는 특별한 날을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비싸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색다른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는 친구다.

문득 그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근사한 곳에 가자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 가보자."


크리스마스 날, 새로 산 빨간 스웨터를 입고 후암동에 갔다. 남산타워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살이 아리는 추위였다. 우리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귀를 감싼 채 와인바를 향해 걸었다.

힐튼 호텔 맞은편 하얀 건물 4층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꼭대기 층에 와인바 하나가 보였다. 군데군데 초가 켜져 있는 어두운 가게 안엔 직원으로 보이는 두 세 명이 움직이고 있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아직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된 듯했다. 나는 유리문을 살짝 열고 물었다.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요."

직원은 우리를 보고 허리를 곧추 세우더니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준비된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했다. 직원은 옆에 있는 행거를 가리키며 편한 대로 가방과 옷을 걸어두라고 말했다. 나는 행거 앞에 서서 코트를 벗었다. 크리스마스라고 새로 사 입은 빨간 스웨터가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자리에 앉자 직원은 물을 따라주었다. 일찍 온 탓인지 와인바는 음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속삭였다.

"불편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연거푸 물만 마시고 있었다.

조금 뒤 다른 직원이 다가와 오늘의 코스를 소개하며 와인을 추천했다. 프랑스, 2017년 산, 오크통, 숙성…. 나는 직원의 말이 끊겨서 들려왔다. 직원의 추천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물었다.

"얼마예요?"

남자 친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메뉴판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마냐고 묻지 말고 메뉴판을 달라고 말할걸. 누가 보면 맛있는 와인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가장 싼 와인을 먹으러 온 사람 같아 보였을 것이다. 나는 괜히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봤다. 빨간 스웨터를 입어서 그런지 액정에 비춘 얼굴이 더 붉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13만 원짜리 사과 향이 나는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사실은 그보다 저렴한 9만 원짜리 와인을 골랐는데 그것이 품절인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직원이 식전 비스킷과 와인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시음해보시겠어요?"

어차피 먹을 건데 시음을 왜 해보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끄덕였다. 직원이 따라 준 화이트 와인을 마셔봤다. 누군가 했던 말처럼 적당히 드라이하면서 삼키고 나면 입안에 달콤한 과일 향이 맴돌았다. 직원이 가고 난 뒤 우리는 서로 잔을 부딪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마셔 봐도 와인의 맛은 좋았다. 나는 입안에 와인을 머금고 냄새를 더 깊이 맡아봤다. 편의점에서 사 먹어 본 와인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고 은은한 과일 향이 났다. 남자 친구와 비스킷을 나눠 먹으며 몇 모금 마시니 한잔을 금세 다 비웠다. 와인 병을 들고 남자 친구에게 와인을 따라주려고 하는데 그가 나를 멈춰 세웠다.

"우리가 따라먹어도 돼?"

"내가 시켰는데 내 맘대로 먹지도 못해?"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나는 눈이 동그래진 그를 보며 푸하하 웃었다.

"괜찮아. 우리 마음이야."

우리는 와인 병을 번갈아 쥐며 서로의 잔을 채웠다.

텅 비었던 가게는 어느새 예약한 사람들로 꽉 찼다. 나는 그제야 가게에 왜 음악이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와인바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끔씩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땐 덩달아 함께 미소 짓기도 했다.


코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소고기 타르타르와 굴, 새우 볼과 감자 수프, 광어, 스테이크가 차례대로 올려졌다. 처음 보는 음식은 양이 적었지만 맛있고 예뻤다.

"어때?"

"좋아. 새로운 것도 나쁘진 않네."

"특별한 날은 특별하게 보내야지."

여태껏 나는 익숙한 것에 익숙했다. 먹어본 맛, 가봤던 곳, 심지어 새로 생긴 가게보다 오래된 가게를 더 좋아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늘 실망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편견이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작을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 친구가 물었다.

"근데, 안 먹어?"

어느새 옆 테이블엔 디저트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옆에는 쪽파 구이가 있었다. 불에 익혀 질겨진 쪽파를 나이프로 썰어 먹어야 하는 건 곤욕이었다. 나는 두세 번 칼질을 하다 그냥 포크로 쪽파를 돌돌 말아 한입에 먹어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긴 쪽파를 나이프로 썰어먹을 생각을 하니 웃기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먹자. 그리고 앞으로는 좀 눈치 보면서 살지 말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와인을 직접 따라 마셔도 되냐고 하던 그가 병을 들고 내 잔에 와인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디저트가 나오기 전까지 와인 한 병을 다 마셨다.

술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휴대폰 액정으로 얼굴을 비추어 보니 빨간 스웨터 때문에 안 그래도 붉어보이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나는 열을 식힐 겸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초록빛 조명이 환하게 켜진 남산타워를 바라봤다. 문득 나도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뜨거웠던 두 볼이 차갑게 식을 때쯤 다시 와인바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따듯하고 포근했다.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 홀로 앉아 디저트를 먹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 중 가장 특별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아 물었다.

"와인 한 병 더 먹을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응. 크리스마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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