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이 밀려오는 곳

"문을 닫아도 파도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by 시선

혼자서 온 시간


“기사님. 작당 마을 가시나요?”


천 원만 내면 되는 버스에 올라타 ‘거시기’로 시작되어 ‘거시기’로 끝나는 전라도 할머니들의 대화에 혼자 피식거리며 부안 시내에서 한 시간 남짓을 더 달렸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던 길에는 생각지도 못한 파도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3일 동안 머무를 '시인의 방'을 찾아 나무 계단을 올랐다. 방문을 여니 방금 전까지 누군가 머무르던 방인 것처럼 온기로 가득했다. 천정에는 차가운 빛의 형광등을 대신한 적당한 노란빛의 조명이 그 온기와 잘 어울렸다. 달랑 침대와 책상뿐인 방의 구조는 끄적거리기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짐을 풀고 방문 밖에 내놓은 맥주 묶음을 뜯어 ‘딸깍’ 한 캔을 땄다. 밀물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와 그 파도소리가 방 안까지 새어 들어왔다. 으스스한 밤공기에 부딪혀 문 앞의 나뭇잎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났고 그 모든 것들의 조화가 달큼한 맥주 맛이 나게 했다.



혼자서 잔 시간


어제 자기 전 남자 친구에게 문자로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눕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적막해 자기 싫다”

고 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꿈도 꾸지 않고 잘도 잤다.


침구는 햇볕 냄새가 나게 잘 말랐고 포근했으며 전기장판 없이도 충분히 따듯했다.



혼자서 먹은 시간


“조식받으러 오셨죠? 시인의 방 앞에 볼 일이 있어 조금 시끄러우실 거예요”


조식을 받으러 가니 주방 문을 열려는 나를 보고 여자 주인이 먼저 나와 조근조근 설명했다. 주방에 있는 공용 냉장고를 써야 하고 주방에는 라면과 달걀, 그리고 칫솔을 무인 판매하고 있었다. 주방을 채운 원두는 주인장의 오빠가 직접 로스팅한 거라며 호스트는 내게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친절했다. 주방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조식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귤 두 알을 트레이에 받쳐 나왔다.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려면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트레이를 옆구리에 걸치고 바람을 맞으며 잔디를 밟는데 낯설다.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조식 운반이었다.


샌드위치는 맛이 좋았다. 베이컨, 상추, 바삭한 식빵으로 기본 재료에 충실한 샌드위치였지만 갈릭향이 났고, 머스타드 소스가 특히 맛있었다. 조식을 아주 천천히 먹으며 집에서 가저온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알차게 갖춰진 드립세트 덕분에 가져온 아이리쉬 원두향이 그 조그만 방을 가득 메웟다.



혼자서 노을을 본 시간

노을을 보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노을이 질 무렵 외투를 챙겨 입고 나오니 언덕 위엔 남녀 한 쌍이 가만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주황빛 노을을 머금고 아무 말 없이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포구로 향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테라스로 모두 나와 주황빛 얼굴로 노을을 보고 있다. 그곳에선 노을이 지면 모두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혼자서 햇볕을 쬐인 시간


이 방에서는 책상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책상에서는 밥도 먹고 사색하고 연필 장난을 한다. 밥을 먹으면 커튼을 걷고 햇살 아래 책을 펼쳤다. 밑 줄을 긋는데 내 마음이 삐뚠지 잘못 그어졌다. 지우개로 살살 지우니 나온 '지우개 똥'. 정말 오랜만에 지우개 똥을 손 날로 슥슥 밀었다.


무얼 쓰고 있는데 발이 뜨거웠다. 책상 밑을 보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서져 책상 아래 네모나게 뿌려져 있었다.


햇살이 좋아 햇볕을 머금으러 나갈까 하다 일단 문을 연다. 책상 밑으로만 떨어지던 햇살이 문이 열리자 방 전체로 와르르 쏟아진다. 책상 밑에 의자를 빼내 문 밖에 내려두었다. 열린 방 문은 자연스레 가림막이 되고, 의자에 앉으니 열린 문에 기대어 햇살을 머금기 아주 좋았다.


그 햇살 아래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쳤다. 햇살을 무시하고 책을 읽으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한 장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다시 덮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겠지만 모두 다 받을 수 없는 낮의 햇살. 해가 중천에 떠서 그 햇볕을 쬐고 있으니 주어진 햇살이 그토록 소중했다. 덕분에 그동안 부족했던 비타민을 든든히 채운다.



혼자서 파도를 듣는 시간


저녁에는 맥주를 먹는데 밖에서는 또 오늘의 밀물이 밀려들어 왔다. 문을 닫아도 파도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밤의 주기로 꼬박꼬박 찾아오는 밀물은 이제 이 시간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진다. 파도를 맞이하는 의식처럼 모든 소리 나는 것들을 정리하고 온전히 파도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남자 친구의 전화에 벌떡 일어나 대답하다 퉁퉁부은 얼굴로 혼자 웃었다. 웬만하면 엎드려 자지 않는데 파도소리는 못 이기는 모양이다. 파도소리 asmr이 따로 없다.


나를 재운 밀물 소리는 잠에서 깨도 여전히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곳에 있는 동안 밀물을 기다리다 3일이 다 간 것 같다. 안정적으로 치는 그 파도소리가 너무 좋아 밀물이 밀려 들어올 때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나를 잠재우던 밀물 소리가 금세 그리워질 것 같다.


밀물이 밀려오는 곳, 혼자서도 무얼 하기 충분한 곳 스테이 변산바람꽃.





글과 사진 / 장소희 @pppmpmf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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