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두려움이 반반이라기보다는, 설렘과 두려움이 각각 100%씩 매우 거칠게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품기엔 버거운 감정을 안고는 변기에 앉아, 또 주섬주섬 임신테스트기가 담긴 봉투를 뜯었다.
(테스트기를 소변에) 담그고, 눕히고 5분을 기다린다. 그리고 단호한 한 줄.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의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의 다음의 다음 날도.. 단호했다. 한 줄, 그러니까 비임신.
“휴우.. ”
이렇게 내쉬는 한숨이 대체 몇 번째일까. 그 동안의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고, 좌절과 실망의 한숨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쉰 지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임신일 줄 모르고 약을 먹었을까봐, 혹은 술을 먹었을까봐, 커피를 먹었을까봐, X-ray를 찍었을까봐 등등. 괜한 걱정에 대한 안도였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는 그 임신, 출산, 육아를 아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이기도 했다. 더불어 좌절과 실망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느낄, 예상 가능할 그 느낌이었다.
이번엔 진짜인 거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시기엔 유독 그 감정이 더욱 깊고 진하게그리고 오래 머물곤 했다. "엄마"가 될 지도 모른다는 건대학에 합격할지도 모른다거나 회사에 취직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는왠지 차원이 달랐다. 졸업도, 은퇴도, 퇴사도 없는 게 “엄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임신은 그만큼 신중하고도 신중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결심 끝에 (혼자도 아니고) 둘이 합심?하여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를 기다린다는 건 지금까지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살 떨리는 것이었다.
그런 결과에 대한 걱정과 좌절, 그리고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자 점차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임신 준비"라는 노력이 이리저리 바삐 살면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이나 이력, 아니면 통장에라도뭔가를쌓는것도 아니고, 심기일전 앉아 열공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남들 눈엔딱히 하는 것 없어 보이지만 그게막상 자기 얘기가 되면 할이야기가 많은 탓이었다.
우선 건강하게 아기를 낳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운 뒤로부터는 뭐랄까,내 몸과 맘이 도통내 것이 아니었다. 이것 만은 평생토록 온전히 내 것일 줄만 알았는데.. 차마 이런 마음인 채로 아기다리 고기다리는 아기마저 좀체감감무소식이니, 속절없이 한 달 안에 몇 번씩은 산부인과의 ‘굴욕 의자’행이었고, 굵고 길고 딱딱하고 차가운 초음파 검사 기구가 내 몸을 한껏 들쑤시는 당혹감에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난소가 약하다고 해서 턱없이 비싼 한약도 먹어봤고, 특정 호르몬은 또 (이유는 알 길 없이) 높대서, 복용방법 한 번 어려운 약도한 바가지씩 받아왔고,피도 갈 때마다 한 종지씩 뽑아댔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호르몬 수치가 떨어질 때까지 복잡하기 그지없는 그 약도 계속 먹고,피검사도 계속 그렇게 때마다 해야 한다나. 그런 갖은 노력에도 야속한생리는 여전히 불규칙했고, 양도 색도 여전히 들쑥날쑥이었다. 임신을 하려니 그귀찮은 생리를 안 해도 문제였고, 약으로 생리 유도를 해도 또 배란이 잘 안 된다며 문제였다. 생리 촉진 주사며배란 촉진 주사며, 임신을 준비하면 꼭 맞아야 한다는 MMR에 A형, B형 간염 항체 주사들까지.. 부지기수로 뾰죡한 바늘에 양쪽 팔이쪽저쪽을 많이도 쑤셔대는 날들이 그렇게 지속되었다.
그 뿐이면 다행일까. 혹시 모르니 또 조심해야 한대서, 어디가 아파 병원을 가도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늘 그렇게 명백하게 밝힌 탓에, 정상적인 치료와 처방은지양하고 더딘 치유를 감수하고도최소한의 치료만을 받아야 했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도 좋아하던 커피보다는 차를, 와인 대신 에이드를, 맥주 대신 탄산수를 택했다. 몸이 차가우면 아기가 잘 안 생긴다는 말에 미치게끔 더운 날에도 뜨끈한 음료를 주문해서 한껏 데워진 몸을 더욱데워야 뭔가 준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만 아는 노력들'을 오래도록 기울여 왔지만 그렇게 아침부터 단호한 그 “한 줄”을 마주하고 나면, 그동안의 노력은 참으로 괜한 것이자, 허사가 되는 것만 같은 허망하고도 무참한기분이들었다. 이에 더해 이렇게 조심하고 노력하고, 또 준비했는데도 누군가의 “아직..이지?”라는 조심스러운 안부 인사엔 그저 쭈뼛쭈뼛 그렇단 대답밖엔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너무 생각하지 마라, 니가 너무 신경 써서 그럴 수도 있다."는 늘들어온 위로를 또 한 번다시 들어야 했고, 나는 또 한 번 괜찮다곤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참..하필 이번 주기는 유난히도 요란했다. 초음파로 난포의 성장 과정도 지켜봤고, 배란이 된 듯한 날도 명백히 확인했으며, 바로 그날에 남편과의 뜨거운 노력도 도모했기에 나는 유난한 기대를 "또" 하고 만 것이다. 괜시리 달뜬 마음에 임신 극초기 증상을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찾아보았는데, 왠지 모조리 다 내 얘기만 같았다. 임신한 그들처럼 나도 으슬으슬했고 더부룩했고 불쑥불쑥 열감도 느껴졌다. 그 뿐이랴, 기분은 통제 밖으로 극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으며, 양쪽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것도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특히 올해가 지나기 전에, 또 괜히 내 생일 즈음인 탓에, 온갖 임신이어야 할 이유를 갖다 대면서 “생일 선물”과도 같은 소식이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애타는 기대를 또 해버리고야 말았고, 단호한 한 줄(번역 : 비임신)을 참으로 완강하게도 주장하는 십여 개의 테스트기를 모두 소진하고나서야 일말의 기대감까지 완전히, 아니 겨우겨우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는 왠지 꼭 만날 수 있을 것 같던, 아니 꼭 만나고 싶었던 좋은 소식은 이렇게 듣지도 전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가고만 있다. 불쑥 차가워진 공기만큼이나 서늘해지는 마음 한구석을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 한 줄로 달래 보려 애써기억해 낸다.힘들여떠올리려던 건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건 정말 노력했다는 증거”라는 구절이었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그 위로들처럼 너무 걱정했다거나 너무 신경 써서라기보다는, 가끔은 무척 부정적였던 내가 스스로에게 앞장서 아프게도 던졌던 것처럼내가너무 예민해서라기보다는..정말 잘해보려고 잘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했어서, 그래서 이렇게 지치고 만 거라고. 임신을 결심하고 기다린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 올해의 마지막 달도 보름 남짓만 남겨둔 오늘은 꼭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