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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 Dec 17. 2021

엄마 준비, 내 엄마를 떠올리다

아직 임신은 아니지만

 이런 말이 누군가에게는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어 솔직한 심정을 뱉어보자면, 나는 엄마 덕분에 '사랑'에 대해서는 정말 남부러울 게 없다. 그리고 미래에 만날 내 아이도 나처럼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어느 날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에 대해 자신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가만히 그리고, 곰곰이 떠올려보니 그건 무릇 엄마가 내게 온전히 집중해 주었던 "시선들" 덕분이었다. 내가 엄마의 사랑으로 가장 진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모두 엄마의 시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시선을 느낄 때면 나의 행복이 곧 엄마의 행복이라는 것에, 그리고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에 도무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너무나 행복해서 엄마를 바라볼 때면 엄마는 마치 온 세상을 얻은 행복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너무도 슬퍼서 엄마를 쳐다볼 때면 엄마는 나를 향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토록 엄마는 내 행복과 슬픔에 나보다 더 몰입해주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와 놀이동산을 가본 기억이 별로 없지만, 내게 가장 큰 행복으로 남아있는 찰나의 눈길은 언젠가 회전목마에서 바라본 엄마의 강렬한 환호였다. 그 회전목마에 앉아 한 바퀴를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나를 보고 뛸 듯이 행복해했던 것이다. 마치 사생팬이 자신의 스타를 보고 열광하듯, 엄마는 나에게 그런 눈길을 보내주었다. 맨날 보는 딸에게 엄마는 그토록 늘 새롭게 열렬한 사랑을 표현해주었다. 마치 내가 엄마의 유일한 스타라고 느끼도록 엄마는 있는 힘껏 내게 사랑을 전해 주었다.        



 내가 남부럽지 않게 받은 건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음식, 갖고 싶은 장난감, 가고 싶은 장소에 갔던 기억이 거의 없다. 사실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해본 기억도 없다. 떼쓰지 않았던 것이 하고 싶은 게 없어서는 아니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유행하는 예쁜 옷을 사달라 하고 싶었고, 근사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하고도 싶었기 때문이다.(가격을 보곤 체념하지 않고) 놀러 간 친구들 집에 있던 반짝거리고 신기한 장난감을 내 방에도 갖다 놓고 싶었고, 주말이면 (아니 주말이 아니라도 일 년에 단 하루뿐인 어린이날이나 생일날에라도) 엄마 아빠 손을 이끌어서 놀이공원에 가자고도 하고 싶었다. 한 손엔 마음처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커다란 솜사탕을 자랑스레 들고, 다른 한 손엔 기분처럼 공중에 붕붕 뜨는 풍선을 들고 싶었던 때가 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러고 싶다 조른 적이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그래 봐야 난색을 지으며 안 된다고 할 게 분명하다고, 어쩌다 그렇게 여기게 된 것이다. 우리 집은 돈이 많이 없으니까. 어린이용 장난감은 실용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좁은 집을 더 비좁게 만들 뿐이라는 걸 일찌감치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갖고 싶은 걸 사려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면, 그리고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려면, 엄마 아빠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힘들고 그러다가 더 많이 싸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린 나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참거나 포기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또래에 비해 참는 데 자신 있었고, 덕분에 떼쓰지 않고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그리고 그게 좋은 건 줄로만 알았다. 엄마 아빠를 위해 착하고 좋은 딸, 가치 있는 딸이 되고픈 당시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하고 싶다'는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엄마가 나에게 뭔가를 하고 싶냐고 물어도, 괜찮다는 말밖엔 할 줄 몰랐다. 괜찮다, 아니다, 상관없다, 그리고 보통이다라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다. 좋고 싫음은 없고 '보통'만 남은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좋다고 하면 사달라고 하는 게 되어 엄마 아빠에게 부담을 줄까 봐, 싫다고 하면 준비한 엄마 아빠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나는 늘 보통이라고 했었다. 그건 어린 시절의 서툰 배려였지만, 나름대로 고민한 최선의 표현이었다.



그런 나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역시 엄마였다. 형편상 해줄  없었을 때는 다른 아이들처럼  사달라고 조르지 않던 아이가 마냥 기특했다지만, 이젠 해주고 싶어도 뭘 갖고 싶단 표현을 도무지 않는 딸의 모습 마음이 너무 아프다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른 애들처럼 엄마한테 좋다 싫다 조르않냐며 속상해하던 엄마였다. 엄마한테는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말해도 된다 했지만, 이미 그런 표현은 내게 몹시 어색해진 뒤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통이고 괜찮다는 딸의 취향을 찾아보려고 이것저것 갖다 대었다. 그리고 맘에  들면 얼마든지 바꿀  있다는 은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늦게라도 해주고 싶었던 엄마의 진심을 내게 성심성의껏 해주었. 그런 엄마의 꾸준함 덕에 나의 호불호는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덕분에 좋다거나 싫다고 말해도 괜찮을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다고 해서 내가 엄마에게 부담 주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해서 엄마의 마음을 거절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엄마는 너무 늦지 않게 가르쳐 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엄마에게 문득 고마워진다. 이미 수많은 역할들로 무척이나 고단했을 삶에, ‘엄마라는 가장 무거웠을 역할 앞에서 어떤 변명도 없이 최선을 다해준 엄마의 노력과 세밀한 시선들 여직까지 고도 애틋한 사랑으로 남아있다. 비록 엄마도 현실의 벽 앞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겠지만,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변명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 필요할 땐 진심으로 내게 사과해 준 용기, 그리고 매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랑을 주려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고 귀를 기울여준 엄마를 기억할 때면 너무나도 감사하고 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남들보다 다소 짧게 경험했던 엄마였지만,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자신할  있는  같다. '양보다는 '이라는 다소 진부한 말이 사랑에서만큼은 진리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남지 않았던 엄마의   끄트머리에서, 진솔하고도 깊은  속마음을 나눌  있었을  내가 엄마에게  번이고  말이 있다. 엄마가 이렇게나  곁을 일찍 떠나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아서 이렇게나 마음이 미어지더라도, 나는 몇 번이고 엄마의 딸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거라고.



엄마는 수도 없이 내게 엄마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해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엄마에게 말했다. 기꺼이  엄마로 살아줘서, 나를 엄마의 딸로 품어주어서 너무도 고맙다고. 나를 엄마의  가장 한가운데에 놓아주어서,  존재를 엄마의 행복으로 여겨준  모든 시간들에 말도  하게 고맙다고. 엄마는 내게 많은  해주지 못해 그렇게나 자주 미안해했지만, 나는 엄마의  진심 어린 시선들로부터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은 기억 밖엔 없다고.  수만 있다면  번이면  ,  번이면   언제고 다시 이렇게 모녀 만나고 싶다고. 엄마가  엄마라서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엄마 덕분에 나는 영원히 잊을  없을, 무한한 사랑을 경험했다고.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엄마가 없는 지금도 이렇게나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 마저 꾸고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울엄마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은, 내 안의 아이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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