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실 거 같아서
내 길치 인생 만 32년 차쯤 됐으니, 이 정도 경력이면 길치의 삶에 대해 조금 아는 척을 해도 되겠지 싶어 오늘의 글을 시작해본다. 나의 길치력을 조금 설명해보자면 나에게 ‘길’이란 철저한 암기의 대상이고 소위 ‘감각’이라는 것으로 접근할 대상이 아니다. 한 예로, 거주한 지 만으로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 동네 은행이나 카페를 갈 때조차 늘 지도 앱을 켜야 할 정도라 십 년을 찰떡같이 붙어 지낸 나의 짝꿍마저 이런 나를 두고, 적잖은 당황을 비추곤 한다.
부끄러움이 많던 학창 시절에는 이 정도면 진짜 무슨 병이 아닐까 싶어, 진지하게 나의 뇌를 걱정한 적도 있었다. 뇌 CT라도 찍어봐야 하나, 남들에게서는 정상 작동하는 뇌의 어떤 영역이 내게서는 제 역할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무엄한 무임승차를 마냥 보고만 있어야 할까, 어떤 의학적 조치를 취해야 하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특별히 조금 똑똑해 보이고 싶은 날이면 이 길치력은 나를 짐짓 환장케 하는 것이었다. 백화점 푸드 코트처럼 조금이라도 넓은 식당을 가게 되면 자리를 못 찾아가는 건 기본이고, 잠깐 다녀오겠다 나선 화장실에서도 50%의 확률로 자주 틀리고 말아서 들어올 때 방향을 외워두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나가 헤매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이 길치의 인생이 늘 우울하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것을 말하고 싶어 입이, 아니 손이 몹시도 근질거렸다. 내가 베스트로 꼽은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세상이 늘 새롭다는 점이겠다. 왔던 곳을 또 와도 절대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왔던 곳을 찾겠다고 길을 헤매다 보면 가끔 새로운 곳을 발견하기도 하는 데 이건 감히 길치의 특권이라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지도를 켜지 않고 걷겠다는 날이면, 힙하고 핫한 장소를 한 두 곳 찾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은 정말 감사하게도 GPS 덕분에 나의 현재 위치를 저장해 둘 수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찾아올 수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도는 잘 읽는다.) 그래서 나와 같은 길치 만렙에겐 이 세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인지 모른다.
남이 쉽게 멋져 보인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지도 앱을 켜지 않고도 척척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 나에겐 그렇게 유능해 보일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이 쿨하디 쿨한 천재 같아 보이는 그런 느낌. 길치가 인간관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는 친구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길을 헤매도 나는 그를 타박하거나 불평할 일이 절대 없다. 그것은 내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친구가 길을 헤매고 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 나의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 되겠다. 우리 남편은 나를 처음 어디 데리고 갈 때 본인이 아무리 길을 헤매도, 타박 한번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참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왔던 곳을 척척 기억해 내는 그를 보며, 내가 진심을 담은 찬사를 날릴 때 우리 남편은 얼마나 으쓱했을까.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나저나 이 길치력은 나이가 들어도 그 기세가 좀체 꺾이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소박한 나의 기억력조차 점점 더 줄어들 테니 이것은 이번 생에서 어쩔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은 불평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노력 없이 가지고 태어나 덕 본 게 있듯, 이것도 그냥 이렇게 생겨먹기를 타고난 거라고. 그래서 길치로 30년 이상을 살아보니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애써 발견하여 이렇게나 열심히 기록하는 중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듬뿍 사랑해주자는 새해 결심의 일환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