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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Nov 25. 2020

코로나 그 후, 10년 차 승무원의 일상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서 걷는, "만보 언니"가 되다.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승무원'. 하지만 요즘은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10년 차 승무원이다.
코로나 19로 수많은 항공업계와 여행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얼마 전, 꽃다운 나이의 여승무원이 휴업으로 인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등졌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내내 마음이 아팠다. 얼굴도 모르는 남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고 나 역시 하루아침에 돌아갈 곳이 없어질까 봐 겁이 나곤 한다. 우리는 갈 곳을 잃었다.


승무원은 수천 명인데 하늘길은 막혔고 비행기는 주기장에 멈춰서 있다. 우리 회사는 순환휴직에 들어갔고 승무원들이 1개월씩 교대로 출근하면서 비행을 하고 있다. 나는 여름에 비행하고 3달째 쉬고 있다. 내년 상반기까지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1년에 3달 일하는 셈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5월부터 회사가 휴업에 들어가고 쉬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남아도는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10년 근무하는 동안 이렇게 길게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놀아본 사람이 노는 것도 잘 논다고 하는 말이 딱 맞았다. 처음 몇 달은 코로나 백신이 대체 언제 개발되는지와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수를 매일 확인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기사를 읽을수록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코로나 바이 러스는 점점 더 우리의 일상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우울해졌다. 이게 코로나 블루인가 싶었다.


몇 날 며칠을 우울해하다가 어느 날 한강을 걸으며 다짐했다. 이제 그만 걱정하고, 그만 불안해하자고.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송두리째 없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2020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집에 처박혀서 걱정만 하고 있는 내가 미련하고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불안에 떤다고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는 것도 아니고 다시 하늘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만 걱정하자. 예전처럼 다시 비행할 수 있을 거야. 다 잘될 거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비행하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필라테스, 꽃꽂이, 도자기 만들기, 베이킹, 쿠킹 클래스 등등 배우고 싶은 것은 많았다지만 통장잔고를 보는 순간 내 버킷리스트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 이상 예전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보다 시간이 훨씬 많아졌지만 그만큼 수입은 줄었기에 하고 싶은 것을 마냥 다 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누구는 도자기를 빚고, 누구는 목공을 배우고, 또 다른 누구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다더라. 여기저기서 다른 승무원들의 근황이 들려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도 뭐라도 빨리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돈도 안 들고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며칠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다 해답을 찾았다.


코로나가 끝나고 예전처럼 바쁘게 일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지. 10년 비행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내 몸에게 보상도 하고 건강해지고 싶었다. 호텔 도착하면 자느라 바빴던 약골 승무원이 아니었던가. 그래!! 규칙적인 운동을 하자.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 운동화와 운동복,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걷기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운동이라고 붙이기에도 민망한 것이 바로 걷기가 아닌가. '매일 꾸준히' 만보씩 걸어보자.




비행하면서는 시간 내서 운동을 하러 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는데 한강을 매일 걷다 보니 한강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한강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한강을 따라 매일 만보를 걷다 보니 어느새 이만 보도 거뜬히 걷게 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같이 걷고 러닝 한 후 인증하는 온라인 모임에서 사람들이 나를  '만보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이 장거리 비행을 가면 흔히 "오늘도 뉴욕에 걸어서 도착했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제는 하늘을 걸을 수 없고 땅에서 걷고 있으니 "만보 언니"라는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걷기 외에 내가 매일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갑작스러운 휴직에 지난 비행 10년을 돌이켜보니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기록을 안 한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시작해보자.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을 그 누구보다 보람차게 보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10 동안 비행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복기하며 글을 써보기로 했다.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밀린 일기를 하루 만에 다 쓴 이후로 나는 글이라면 치를 떨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 바로 글쓰기 모임을 검색해서 그 날 이후로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내 안에 이렇게 수많은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매일 글을 쓰며 글이 주는 힘을 알게 되었다. 30여 년을 통틀어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나는 요즘 매일 글을 쓰고, 매일 만보를 걷고, 국민내일배움카드 지원을 받아 꽃을 배우며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 활동을 하며 풍족했던 예전과는 달리 주머니가 많이 가볍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넉넉하다. 보잘것없지만 의미 있는 내 10년의 비행담과 코로나 이후의 일상을 담은 나의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훗날의 나를 더 단단하게 성장시키기를 바라며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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