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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Dec 16. 2020

승무원이지만 비행이 없습니다

비행이 없어서 100일 동안 꾸준히 한 것은?

두 부류의 승무원이 있다. 비행 가서 열심히 투어를 하거나, 호텔콕만 하는 사람. 나는 철저히 후자에 속한다. 물론 이런 나도 처음부터 호텔룸에만 있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도 보고 영국에 가면  대영박물관 가서 문화생활도 하는, 말 그대로 비행을 즐기는 활동적인 승무원이었다. 신입일 때 너무 쉴 틈 없이 돌아다녔던 걸까. 연차가 차면서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현지 투어를 가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귀찮고 힘든 일로 여겨졌다. 장거리 비행을 가면 밥도 먹지 않고 12시간을 내리 잔 적도 있었다. 현지에서 체류하는 동안 하루 정도는 충분히 자야 체력 회복이 되었기에 어디에 구경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투어 대신 호텔콕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내 캐리어에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책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승무원이다.

비행 갈 때 캐리어에 항상 책 한 두 권을 챙겨가는 게 습관이었다. 비행 가서 잠이 안 오거나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책을 읽으려고 늘 챙겨가곤 했다. '이번에 비행 가서는 이 책을 몇 페이지라도 꼭 읽고 와야지' 호기롭게 다짐하며 책을 챙겼다. 14시간을 날아서 막상 호텔에 도착하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을 자느라 책을 꺼낼 시간 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짐을 싼 그 상태 그대로, 내 책은 내 캐리어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곤 했다.

물론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책을 많이 읽는다는 말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책을 늘 가지고 다녔지만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코로나 19로 휴직이 장기화되면서, 4개월째 비행이 없다. 예전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남아돈다는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시간이 남아돈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다. 시간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이 소중한 것이기에.


어쩌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인생 최대의 위기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보다 더 나은 나로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어서 매일 꾸준히 하기로 다짐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중 하나가 매일 책을 10페이지 이상씩 읽기였다.


나 요즘 매일 책 읽어. 10페이지 이상씩.



매일 10페이지 이상씩 책을 읽는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10페이지? 별 거 아닌데? 10분이면 되는 거 아니야? " 이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면서 매일 10페이지씩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매일 책을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호모부커스 인증 1일 차



살면서 단 한 번도 매일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책 말고도 넷플릭스, 유튜브 등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책을 읽으려고 폈다가도 스마트폰을 만지기 일쑤였다. 책 앞에서는 집중력이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책을 좋아하더라도 매일 책을 읽기란 스스로와의 약속이자, 도전이었고,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 내가 100일 동안 매일 책을 읽었고, 12권의 책을 완독 하고야 말았다. 혹자는 100일 동안 읽은 책이 고작 그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책을 이것저것 다 사서 읽다가, 흥미를 잃으면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내 독서습관이었다. 항상 한 해의 끝자락이 되어 1년을 돌이켜보면 완독 한 책이 몇 권 안된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렇다고 안 읽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카카오 프로젝트 100 [호모 부커스-매일 읽고 사람 되자]에 참여하면서 매일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책을 완독 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책을 읽었고 100% 인증률을 달성했다. 그리고 또 하나를 얻었다. 바로 자존감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한 말이 있다. 남들이 몰라도 내 자신이 기특하게 보이는 순간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호모부커스 100일 차 인증샷



비행을 10년 남짓 하면서 여느 직장인들처럼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직장인에는 월급과 승진이 전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도 승진 이외에 성취감을 느낀 적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행을 할 때보다 지금이 스스로가 기특한 순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매일 10페이지씩 책을 읽고 혼자 뿌듯해하며 인증한 순간들이 그렇고, 책 1권을 완독 했을 때가 그렇다. 이런 뿌듯한 날들이 모여 100일 전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기를 바란다.




요즘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고, 언제 또 비행을 할 수 있을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 코로나 19 팬데믹이 끝나고 예전처럼 다시 비행하게 된다면, 호텔에서 읽으려고 캐리어에 고이 가져간 책을 꺼내어 적어도 10페이지는 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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