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과 마음을 챙긴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10년 차 승무원이다. 작년 5월 이후 회사가 휴업에 들어가서 10개월 동안 딱 두 달만 일했다. 비자발적 휴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재충전의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2021년 상반기에 백신이 나오면 예전처럼 다시 바빠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씩 비행을 가면 '아, 코로나 종식은 아직 멀었구나'라는 현실이 피부로 와 닿곤 한다. 만석이었던 비행기가 텅텅 빈 모습을 보면 코로나 종식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렇다면 비행이 없는 승무원은 지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나 같은 경우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며 하루를 채우고 있다. 바로 내 몸과 마음을 챙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행하는 10년 동안 내 건강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여실히 느끼고 있다.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1년 동안 운동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날들도 있었다. 비행 가면 호텔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곧바로 잠든 날도 부지기수였다.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을 달고 살았고, 무거운 것을 드느라 허리디스크가 터지기도 했다.
수년간 내 몸과 마음에 소홀한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자주 아팠고 금세 지쳤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그저 매 비행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루를 살아낼 일이 아득하여 늘 몸과 마음에 힘이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버렸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 그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요즘은 나를 사랑하고 내 몸과 마음을 챙기는 일에 온 신경을 쓴다.
코로나 19로 휴직하는 동안 매일 하고 있는 것은 만보 걷기, 책 읽기, 필사하기이다. 만보를 걷지 못하는 날이면 홈트로 대체하기도 한다.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4-5번은 운동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2번 꽃꽂이 수업을 들으러 간다. 항공업이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돼 '국민 내일 배움 카드' 지원을 받아 꽃꽂이 학원에 등록했다.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하루 종일 꽃을 만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것은, 꽃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꽃은 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요즘 나는 꽃에 마음을 쓰는 시간이 참 좋다.
어제는 새로 등록한 꽃꽂이 과정이 새로 시작한 날이었다. 작년 10월부터 꽃을 배웠으니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아침 8시에 집에서 나가 해 질 무렵에서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얼마나 지친 하루였는지 친구에게 하소연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나 이제야 꽃 수업 끝났어. 꽃 수업은 너무 좋은데 강남은 정말이지 너무 멀다. 얼른 샤워하고, 글 쓰고, 필사하고, 책 읽기 인증도 해야 돼"
"얼마 전에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책을 봤는데, 혹시 네가 쓴 거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니, 지금 내 상황에 찰떡인 표현이다. 비행을 할 때보다 어쩜 이렇게 매일매일이 바쁠 수 있을까. 비행할 때 "나 바빠, 시간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회사에서 주는 비행 스케줄에 나를 맞춰 살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한 데이 오프를 흘려보냈다. 시간을 흘려보내며 계절도 잃어버렸다. 꽃이 피고 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요즘은 플래너를 쓰며 시간 단위로 하루 일과를 기록하고 있다. 시간을 주도적으로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만족감을 준다. 꾸준함은 늘 탁월함으로 보답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재보다 미래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아마 비행한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알차게 시간을 썼더라면 지금쯤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싶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부지런도 병이라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좀 쉬라고 말이다.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을까? 아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충전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이 마음 깊숙한 곳에는, 곧 코로나가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분명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책과 아이패드를 챙겨 카페에 나왔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필사를 마쳤다. 창 너머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코로나 종식의 날이 오긴 할까 언뜻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훗날 휴직했던 지금의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후회 없이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를 떠올려본다.
"쉬면서 뭐했어?"
"코로나 19 때문에 돈은 못 벌었지만, 코로나 19 덕분에 내 몸과 마음이 단단해졌어."
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