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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Nov 28. 2020

나는 불면증 환자였다

코로나 19가 나에게 준 것


머리만 대면 잠드는 사람이 부럽다. 나는 불면증 환자였다. 어릴 때부터 잠귀가 밝아서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도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소음이 나는 온갖 물건들을 방에서 치워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내 불면증은 승무원이 되고 나서 더 심해졌다.


승무원은 회사에서 매달 스케줄을 받고 그 스케줄대로 비행을 간다. 어떤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날도 있고 또 어떤 날은 늦은 오후 출근이라 늦잠을 자도 되는 날도 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날이면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된다는 압박감에 일찍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새벽 비행 전날, 어김없이 저녁 8시부터 침대에 누웠지만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잠에 들기 위해 양도 세어보고 잠이 잘 온다는 귀뚜라미 ASMR을 들으며 필사적으로 자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잠은 오지 않고 시계를 볼 때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나는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고 내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졌다. '지금 잠들면 7시간은 잘 수 있어!' '지금이라도 자면 5시간은 잘 수 있어!'  마음속으로 제발 지금이라도 잠들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양을 셌다. 양을 오백 마리까지 센 날도 있었다.

혼자 외롭게 잠과의 사투를 벌이다가 몇 시간 자지 못한 채 몽롱한 정신으로 비행을 가는 날들도 많았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장거리 비행을 가면 그 나라 시차에 맞춰 잠을 자야 했다. 이런 불규칙한 바이오리듬이 반복되자 불면증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입사하고 1년 차 막내시절, 수면 부족 때문에 부팀장님께 조언을 구했다.
"사무장님, 해외에서는 시차 적응 어떻게 하세요? 저는 아직도 시차 적응이 너무 어려워서 잠을 잘 못 자요."
" 나도 아직도 그래. 나중에 미국 가서 '멜라토닌'을 사서 먹어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멜라토닌?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뇌에서 분비되는 생체 호르몬으로 불면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이었다. 한국에서는 멜라토닌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어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건강기능식품으로 분류되어 있어 마트에 가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미국 비행 가서 마트에 가보니 용량별로 멜레토닌이 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제일 용량이 적은 3mg 약으로 구입한 후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멜라토닌을 복용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몰라도 멜라토닌을 먹기 시작한 후로 잠이 잘 오는 것이 아닌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드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30분 이내로 잠에 들곤 했다. 그 후로 매 비행마다 내 가방 한편에는 멜라토닌 약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약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약이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알지만 수면 부족 상태로 비행을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멜라토닌을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3mg으로 시작했지만 내성이 생겼는지 멜라토닌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았고 결국 5mg으로 용량을 늘려야 했다. 멜라토닌은 먹은 후 바로 잠에 드는 게 아니라 서서히 잠을 유도해주는 약이다. 나는 멜라토닌을 먹어도 침대에 누워서 30분 이상 잠 못 드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 병원에 가서 수면제를 처방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는 멜라토닌보다 훨씬 더 빠른 효과가 있었다. 거의 먹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다음날 헤롱헤롱 한 상태로 일어나는 날도 있었지만 수면제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잠을 충분히 자고 맑은 정신으로 비행을 가고 싶은 내 욕심이 내 몸을 점점 더 망치고 있었다.

잠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약을 좀 줄여보자고 결심하던 찰나, 코로나 19가 터지고 올해 4월부터 비행 스케줄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휴직을 시작하면서 수면제를 끊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미 몇 년 동안 내 몸은 멜라토닌을 비롯한 수면제에 길들여져 있어서 처음에는 약 없이 잠드는 것이 힘들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였던가. 한 달 동안 수면제를 먹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내 몸도 금세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오전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늦게 일어나도 돼.'
'잠이 안 오면 잠을 안 자면 되지. 밤새도 괜찮잖아? 어차피 출근도 안 하는데.'

잠을 충분히 못 자면 큰일 날 줄 알았지만 잠을 못 자도 다음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을 조금 자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동안 비행을 못 가게 되었지만 코로나 19는 나에게 귀한 것을 주었다. 바로 10년 동안 누리지 못했던 규칙적인 생활이다. 일하는 동안 불규칙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정한 수면 시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돈을 좀 못 벌면 어떤가! 나는 건강해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정신 승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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