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바라보는 내 '눈'이 달라졌다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자꾸만 창문을 열어 밖을 보게 된다. 얼마나 눈이 쌓였나 하고.
승무원이 되고 나서 이렇게 눈이 반가운 적이 처음이니 약 10년 만에 눈이 예뻐 보이는 것 같다. 창 밖으로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나 자신이 낯설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다.
나는 재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눈 내리는 날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눈을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은 비행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안전 운항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눈이 오면 디 아이싱(de-icing, 얼음 제거 작업)을 해야 해서 항공기 운항이 지연되는 일이 빈번하다.
"아니 대체 언제 출발한다는 거야?"
"손님, 디 아이싱 작업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전운항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승객을 태우기 전에 디 아이싱 작업을 마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승객을 태운 후에 작업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승객들에게 항공기 지연 관련하여 양해를 구해야 하고, 혹 다른 연결 편 항공기로 환승하는 승객들이 있다면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이 쌓인 길을 캐리어를 끌고 가야 하는 험난한 출근길은 또 어떤가. 눈이 녹아 질퍽한 길을 뚫고 리무진을 타러 가는 출근길은 평소보다 더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듯 눈 오는 날 비행 가는 생각만 해도 늘 한숨이 절로 나오곤 했다.
추위를 많이 타서 본래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승무원이 되고 나서 이 두 가지 이유로 눈 내리는 겨울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비행을 가지 않는 요즘은 눈 오는 날이 싫지 않다. 눈을 싫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눈을 바라보는 내 눈이, 그리고 내 마음이 달라졌다. 눈은 더 이상 나에게 귀찮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유니폼을 입고 나서부터 날씨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따뜻한 봄날에도 비행 다녀오면 꽃이 다 져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출근하기 싫었고, 후덥지근한 장마철도 싫었다. 비행할 때는 몰랐지만 코로나 19로 휴직이 장기화되면서 작년 한 해는 사계절을 온전히 한국에서 보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봄에는 꽃이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수놓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우리나라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올 가을에는 우리 집 앞에 있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고맙기까지 했다. 원래 그곳에 단풍나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늘 정신없이 출근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퇴근길에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여행도 못 가는 시국에 이렇게 집 앞에서나마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행을 못 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매일 만보씩 걸을 여유도, 책 읽고 글 쓸 시간도 주지만 더 값진 깨달음을 주고 있다. 흘러가는 시간도, 사계절도, 비행도, 심지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까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니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이다.
자, 이제 이 깨달음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렸다. 다시 유니폼을 입어도 잊지 말자.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