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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Jan 22. 2020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글태기

글태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커서가 깜박이는 화면.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글감. 몇 글자 적어보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꾸역꾸역 완성해 나가는 마음. 글태기를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느껴본 감각이리라. 이 시기에는 마감에 쫓길 때 발현되는 극도의 효율과 집중력을 빌리게 된다. 창작은 죄의식을 통해 생산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미루기의 굴레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필자는 미루고 미루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위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면서 쌓아온 죄의식은 두려움과 엉켜서 시작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마감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늦지 않았다고 다독이며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비하를 방패 삼아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택하면서 깊은 글태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글태기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연극 평론 수업이었다. 한 학기 동안 연극 세 편을 보고 비평문을 작성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타오르게 하는 수업이었기에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필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리를 해서 크게 넘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수업에서도 비평문 발제를 맡겠다고 나섰다. 글에 대한 다양한 피드백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발제하기는커녕 마감 기한까지 한 글자도 써서 내지 못했다. 수업 전날에는 카페에서 울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겠다고, 뭐가 두려운지 모르겠다고···. 과제 제출이 급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꿔 말하면 진심이 아니면 못 적겠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지어내기보다 투박하더라도 마음을 다해 적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었다. 결국은 여러 번 구상하고 작성하기를 반복하다가 발제를 못 하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수업 당일, 교수님께 보냈던 무책임한 문자


시작하기 전부터 결과물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 일 자체를 회피하는 자아와 너무 잘 쓰고 싶어서 욕심을 내는 자아의 싸움은 반복되었다. 특히 잘 해내야 한다는 욕심과 압박감은 비례해서 글에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예컨대 문장에 힘을 잔뜩 주게 되었다. 힘을 주고 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읽는 사람은 거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은 정직해서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어떤 의도였는지 금세 파악하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힘이 있고, 정확하게 말하려는 의지가 느껴져.”

 

“맞아. 어떻게 알았어?”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쉽게 정의 내리고 판단하며, 문장마다 힘을 주는 게 느껴진다는 말을 친절하게 돌려서 말해준 것이었다. 수영을 잘하고 싶은데 온몸에 힘을 주면 물에 뜰 수 없듯이 불필요한 힘이 좋은 글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가 두려워졌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무서웠다.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모르는 채로 글을 쓰지 않으니 허탈하고 초조한 마음에 책만 가득 빌려왔다. 이곳저곳을 들춰보면서 나와 어떤 점이 다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뜬 눈으로 여러 밤을 지새우며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답을 찾아 나섰다.


허탈하고 초조한 마음에 빌렸던 책들


그러던 와중에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다시금 천천히 읽으면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글이라는 것은 정확한 표현과 지식의 전달 혹은 자랑이 아닌 양질의 대화에 목적이 있는 것,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세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며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태도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글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었다.


“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 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지만 글쓰기도 그렇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안 준 것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글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시간을 온전히 들이는 게 두려워서 회피했던 시간이 길어졌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말하는 기쁨, 진솔한 고백이 주는 편안함,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려는 즐거움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단지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에 취해서 정말 봐야만 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장강명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을 시간이 지나 다시 살피면서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점검하는 것, 그러다 때로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 가끔은 ‘나 글 진짜 못 쓰는구나’라고 자학하는 것도 작가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세상에 글을 계속해서 보여준 뒤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 이 모든 과정이 문장과 문장을 엮는 힘을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극복해가는 거라고. 잘 해내려고도, 완벽해지려고도 하지 말고 계속 해보자고. 그렇게 좋은 문장의 힘을 빌려 오늘도 이 글을 세상에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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