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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Dec 08. 2019

사랑의 단상과 혼잣말 그 어딘가

2019년 2월, 어느 날


문득 일기장을 훑어보다가 아득했던 순간들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페이지를 채 넘기기 전에 몇몇 문장 앞에서 발길을 오랫동안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다. 특히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렇다. 나는 몇 달 전에 짧은 연애의 마침표를 찍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 앞에서 실컷 호들갑을 떨었다. 때아닌 소식에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워했고, 부모님은 이성에 눈곱만큼도 관심 없을 줄 알았던 딸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평소와 다르게 들뜬 모습이 어색해서 괜히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때로는 모든 중력이 한 사람에게 향하다 보니 온 신경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연애를 시작할 무렵에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떠올렸다. 셀린과 제시가 서로를 곁눈질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춤을 추는 미셸과 알렉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랑 노래들과 수많은 뮤지컬 넘버들, 로맨스 서사에서 골라낸 어마어마한 양의 사랑, 그 속에서 배운 지식으로 열심히 흉내 냈지만 늘 어설펐던 모습까지.


사랑이라는 인상에 참여하는 이미지와 나의 연애가 마구잡이로 섞이게 되었다. 그렇게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나는 유치하게도 조금은 우쭐해졌다. 누구보다도 사랑을 잘 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에게 으스대며 연애 카운슬링을 자처하기도 했다.


누구나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질 줄은 모르고 시작하지 않던가. 유호진 피디가 쓴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 사람이 오는 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이토록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인 줄도 모르고 나는 한 사람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을 단숨에 받아들였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이 들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문학동네, 2015, 105쪽.


거대한 파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그곳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세상의 일부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곳에는 기억만이 자리했다. 그 기억을 잊고 살아갈지, 붙들고 살아갈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후자가 아닌 전자를 택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모른 척하기까지 걸릴 까마득한 시간 앞에서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게 추억을 곱씹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이별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문학동네, 2015, 47쪽.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라고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되뇌었다. 결국 이별은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그 과정이 무척이나 구지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은 하염없이 일렁이는 감정의 물결이다. 마치 잔잔한 물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이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그때 연인은 온전한 세계의 반쪽을 가져온다. 혼신의 힘을 바쳐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져오는 세상으로 인해 나의 우주는 조금이나마 넓어지고 팽창한다. 이것이 사랑 끝에 유일하게 남은 한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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