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촉박하게 치러졌다. 그것을 핑계로 ‘늦장 공약’은 정당화됐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사전투표 시작 사흘 전인 5월 26일 공약집을 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사전투표 하루 전인 28일에서야 공약집을 공개했다. 선거의 기본은 정책인데 후보자들은 그 기본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뤘다.
공약집이 이 정도로 늦게 나온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똑같은 조기 대선이었던 2017년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선거일 22일 전 공약집을 발간했고,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11일 전 내놓았다. 유권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삶의 조건에 따라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고 판단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후보의 이름과 발언만을 보고 투표소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 거주하거나 체류 중인 재외국민, 군 장병 등 사전투표를 미리 마친 유권자들은 공약집을 손에 쥐지도 못한 채 표를 던졌다. 이들은 후보의 구체적인 정책 방향도, 약속의 실현 가능성도 모른 채 투표에 임해야 했다. 유권자가 알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선거는 과연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까.
양당은 조기 대선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고, 공약집을 완성할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조기 대선이라는 변명 뒤에 숨기엔 명백히 소홀한 대응이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채 선거에 나섰다는 자백처럼 들린다. 공약은 단순한 서류나 홍보물이 아니다.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계획이며 국민에 대한 약속이다. 마지막까지 공약을 미룬 정당에 정권을 맡겨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공약집이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운 것은 네거티브 공방뿐이었다. 이 후보는 “내란세력 심판”만을, 김 후보는 “형수 욕설”을 반복적으로 거론했다. 상대 후보자의 과거 발언을 끄집어내 깎아내리거나 상대 진영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 말싸움만이 선거판을 뒤덮었다. 정책은 실종되고 감정만 남았다. 결국 유권자들은 ‘누가 더 싫은가’를 기준으로 표를 던져야 했고, 민주주의는 피폐해졌다.
공직선거법상 후보자는 공약집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하지만 그 발간 자체는 의무가 아니다. 법적으로 제재할 수단도 없다. 매번 선거 때마다 공약이 실종되거나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이유다. 공약집 공개를 의무화하고, 일정 시점 이전에 유권자에게 공개하도록 입법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늦장 공약집은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허점이 방치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약은 단지 선거용 종이가 아니다. 유권자와 맺는 계약이며 정치를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증거다. 이번 대선은 그 증거를 너무 늦게 내놓았다. 우리는 대체 어떤 미래를 약속받고 표를 던졌는가. 그런 약속조차 미뤄둔 정치에 더 이상 어떤 신뢰를 기대할 수 있는가. 대선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해당 칼럼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사진출처=민주당·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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