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인문사회, 끝은 자기계발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김영사) ●●●●●●◐○○○

by 눈시울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정치인이 신비로운 용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거창한 말 속에 숨기는 방법으로 실제 고통을 위장하고 변명하려 들지 모른다. 특히 다음 네 단어를 조심해야 한다. 희생, 영원, 순수, 구원. 이 중 어떤 단어라도 듣게 되면 경보음을 울려야 한다. "그들의 희생이 영원한 우리 민족의 순수함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지도자가 상습적으로 해대는 나라에 살고 있다면 각오해야 한다. 정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그런 지도자의 주문은 늘 현실의 용어로 바꿔 이해해야 한다. 즉, "병사는 고뇌 속에서 울고, 여성은 얻어맞고 야만적인 취급을 당하며, 아이는 두려움 속에서 떨게 될 것" 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 p. 466. 의미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 이어지는 최종작답게, 이 책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사피엔스'에서는 잠깐, '호모 데우스'에서는 꽤 깊게 파고 들어간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그로 인해 급격히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록 책의 전체 분량과 비교하면 1/10 정도의 분량이긴 하지만, 이 부분의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이야기들이 사상과 종교의 충돌, 전쟁과 테러와 민족주의와 이민 문제처럼 지금의 우리의 눈앞에 있는 절박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 생각해보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일이 채 몇십년도 남지 않았다는 현실 앞에서 아무리 지금의 문제가 크다한들 그다지 큰 울림을 줄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머리를 굴려봤자 몇십년쯤 지나(유발 하라리는 단언에 찬 어조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일이 4반세기 후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이 나온 게 2018년이니 이제 20년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알파고님께서 압도적인 두뇌와 이를 통해 만들어내는 논리폭탄들과 소수의 물리적 무기로 모든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해결을 위한 노력에 김이 빠질 수밖에.


. 그렇기 때문에 호모 데우스에서 그랬듯, 유발 하라리가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인류의 미래는 더없는 디스토피아다. 알고리즘의 극한 앞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막연하게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해 온 소수의 지배와 다수의 피지배 구도조차도, 인류가 결정권을 가지고 존속된다는 점에선 그나마 희망적인 미래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어쩔 수 없이 - 1장에서 책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에 - 유발 하라리는 압도적인 디스토피아에서 눈을 돌려 현실로 어영부영 돌아온다. 굳이 미래가 아니더라도 지금도 21세기고, 아무리 20년 후면 모든 게 다 마무리된다지만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하니까. 전반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 열린 마음을 가지고 -> 사실을 직시하자는 내용이 주제만을 바꾼 채 반복되기는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게 최선인 것도 맞는데다 문제제기는 날카롭고 필력도 좋으니 딱히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테러에 대한 비유도 꽤 멋있었다. 이렇게 줄어드는 페이지를 보며 무난히 책이 마무리 되겠지 하던 이들에게 어떻게든 답을 줘야겠다는 강박에서 나온 어이없는 마지막 장만 아니었다면 꽤 괜찮은 책이었다. 그냥 절망적인 인류의 미래에 대해 답을 못 내겠으면 그냥 못내겠다고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었을텐데, 유발 하라리는 글을 쓰던 본인이 절망에 빠졌는지 정신론으로 마무리되는 황당한 마무리를 끼얹는다. 그 마무리 없이 20장으로 끝났다면 이 책에 1.5점 정도는 더 줄 수 있지 않았을까. (__)


. "명상? 안 사요. 그런 거."




테러범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를 닮았다. 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찻잔 하나도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한 마리가 도자기 가게를 부술까? 파리는 먼저 황소를 찾아낸 다음 귓속으로 들어가서 윙윙대기 시작한다. 황소는 두려움과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바로 이런 일이 9.11 이후에 일어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황소를 자극해서 중동이라는 도자기 가게를 파괴했다. 이제 테러범들은 도자기 잔해 속에서 번성하고 있다. 세상에 성마른 황소들은 널렸다.

- p. 241. 테러리즘 '당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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