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신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타인의 해석 - 말콤 글래드웰(김영사) ●●●●●●●○○○

by 눈시울


약탈과 기만에 맞서는 방어수단으로 신뢰를 포기하는 것은 더 나쁘다.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설렁설렁 훑어보고는 다른 사람의 심중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여긴다. 낯선 이를 판단하는 기회를 덥석 잡아버린다. 물론 우리 자신한테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은 미묘하며 불가해하니까. 하지만 낯선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책에서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이런 사실일 것이다. '낯선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다.'

- p. 75. 비대칭적 통찰의 착각.




.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죽 읽어온 독자라면 이 책의 처음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초기작인 '블링크'에서 자료 분석의 함정을 경계하며 아름다운 문장으로 "첫 2초 동안 무의식에서 섬광처럼 일어나는 순간적인 통찰"의 힘을 이야기했던 그는, 이번 저서 '타인의 해석'에서는 우리가 낯선 이를 접하면서 하게 되는 오해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평생 사람을 파악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온 판사들은 범죄자에 대한 보석 결정에서 컴퓨터에 완패했고, 노회한 정치인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만나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완전히 오판했으며, 미국 국방정보국은 스파이에 대한 수많은 정황증거를 잡아놓고도 용의자를 대면한 자리에서 그가 결백하다고 단언해버린다. 그렇게 말콤 글래드웰은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이야기한다. "낯선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다."


. 말콤 글래드웰은 이 책에서 자신이 블링크에서 했던 말을 딱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물론 세세하게 보자면 블링크에서의 '직관'과 타인의 해석에서의 '판단'은 완전히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책에서 타인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직관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책에는 블링크의 일부분이 사례로 언급되기까지 하는데도.





우리는 이 결정이 아무리 끔찍한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

- p. 177. 누구와 일할 것인가.




. 다만 이 부분을 살짝 덮고 넘어가준다면, 이 책의 내용 자체는 새겨둘만하다. 아니 새겨두어야만 한다. 이 책은 낯선 사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낯선 사람을 쉽게 알 수 없으니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처세술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우리가 낯선 사람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집단과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인류에게 부여된 '진실의 기본값'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런 잘못된 판단과 그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 우리는 진실의 기본값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제와서 '불신의 기본값'이라는 시각을 가지기엔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를 하는 이들이 배신당하지 않도록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고 교육을 해야 하지만, 개인 역시도 다른 이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비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이 책 서두에 나오는 샌드라 블랜드와 브라이언 엔시니아의 대립은 '불신의 기본값'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극이다. 총기 보유가 일상화된 미국에서 경찰은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신경을 소모하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범죄자가 언제든 자신에게 총을 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며, 그 반대편에는 인종차별에 고통받은 경험으로 공권력을 신뢰하지 않는 유색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의 충돌을 보면서, 우리는 신뢰 없는 사회가 얼마나 서로를 - 그리고 불신하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의 이 책이 언제나처럼 전미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그 다음 해에 벌어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BLM 운동과 폭동은, 불신하는 사회의 비극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우선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 데 대해 서로에게 벌을 주지 않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설령 당신이 방 안에 있는데도 아이가 낯선 이에게 학대를 당하더라도 당신이 나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대학 총장인데 직원 한 명에 대한 모호한 보고를 받았을 때 곧바로 최악의 시나리오로 건너뛰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 관해 최선의 가정을 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만들어낸 속성이다. 타인을 신뢰하는 우리의 본성이 모독을 당하는 사태는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대안, 즉 약탈과 기만에 맞서는 방어수단으로 신뢰를 포기하는 것은 더 나쁘다.

- p. 397.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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