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함께 몰고 간 전쟁

몽유병자들 - 크리스토퍼 클라크(책과함께)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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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14년 유럽의 현실은 '국제관계' 모델이 시사하는 것보다도 더 복잡했다.



오스트리아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1892년에 출간한 '주관적 공법체계'에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인 힘"을 분석했다. 이 표현으로 그가 의미한 것은 현존하는 상황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경향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그 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에 갇힌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로부터 현존하는 상황이 정상적이고 따라서 어떤 윤리적 필연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추정으로 금세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 격변이나 혼란이 발생하면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고, 이전 질서에서 인식했던 것과 동일한 규범적 성격을 새로운 상황에 부여한다.

- p. 562. 마지막 기회 :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 히틀러라는 확실한 의지를 가진 주체가 있던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의 발발은 이런저런 책을 읽어봐도 영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 열린 베르사유 회담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게 물어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청구하기도 했고, 실제 1차대전에서 '사라예보의 총성'의 당사자인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데 비해 독일은 양대 전선에서 전쟁을 도맡아 수행했으니 독일이 전쟁의 주역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 하지만 정작 전쟁의 발단이 된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문제였지 독일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보면, 1차대전은 2차대전처럼 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행위자가 전쟁을 주도했다기보다는 복잡하게 얽혀있던 당시의 유럽 정세에서 줄에 매달려 있던 이들이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차례차례 끌려가 수렁에 빠져버린 것에 가깝지 않나 싶다. 프란츠 황태자의 암살자들은 물론이고 그 배후에 있던 이들 역시 국지적인 영토 회복 정도를 원했을 뿐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결국 1차대전은 그 때까지 일어난 전쟁 중 가장 큰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바라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전쟁이라는 아이러니를 띤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색인과 참고문헌을 제외한 본문만 봐도 그렇다)을 1차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밝히는 데 할애한다. 더구나 그 방대한 분량에서 1차대전이 일어난 후의 내용은 독일의 벨기에 남부국경 침범과 이로 인한 영국의 참전 결정을 다루는 25페이지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전제가 되는 몇몇 과거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면 1903년 6월의 세르비아 국왕 암살에서부터 1914년 8월 초에 내려진 각국의 개전결정에 이르기까지 10여년 정도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800페이지를 쓴 것이다.


. 그 덕에 이 책은 대 세르비아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호전적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과 갈팡질팡하는 무기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신들, 끊임없이 발칸에 손을 뻗는 러시아, 허풍쟁이 빌헬름 2세와 독일의 강경파들,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알자스-로렌의 상실에 이를 갈고 있는 프랑스, 동맹국과 독일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저울질을 하던 그레이의 영국 등 1차대전의 주요 배우들을 하나하나 소환시켰다가 퇴장시킬 수 있었다. 1차대전에 대한 꽤 많은 책이 있지만, 이렇게 왕과 정치인, 관료들의 이야기를 날짜별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은 흔치 않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의 신문기사처럼 시간 순으로 잘 정리된 내용을 보면 볼수록, 1차대전의 발발원인은 영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1차대전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간의 충돌이라고 배웠지만 실제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적대관계, 러시아와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를 제외하면 이 구도는 생각보다 훨씬 취약했다. 생각해보면 영국과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오랜 숙적이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비스마르크 때 전쟁을 벌였고,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유라시아 곳곳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사이가 아니었던가. 당시로 국한하더라도 독일과 영국은 마지막까지 중립을 비롯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고, 빌헬름 2세는 프란츠 황태자의 암살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으며,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조차도 세르비아에게 사라예보 사건은 세르비아의 잘못이며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다.



. 이렇듯 1차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국제적으로는 동맹국끼리도 개입에 대한 의견이 달랐고 국내적으로는 왕과 관료들이 치열하게 대립했으며 여기에 언론과 여론은 연일 강경한 주장을 쏟아냈다. 이런 상황에선 자료가 아무리 쌓여봐야 주도자나 책임자라고 할만한 이를 지목하기는 어렵다. 결국 1차대전은 특정한 플레이어가 사태를 주도했다기보다는 불확실한 국내외의 관계들과, 사실과 당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미 일어나버린 사실을 마땅한 당위로 인식해버린 각 행동주체들의 안일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옐리네크의 책에서 인용한 것처럼 '현존하는 상황이 정상적이고 따라서 어떤 윤리적 필연성을 구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오류가 이 시기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누구 하나의 돌출행동이 곧바로 기정사실로 수용되어 사태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들을 가리켜,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라고 가열차게 비판한다.




1903~1914년 유럽의 현실은 '국제관계' 모델이 시사하는 것보다도 더 복잡했다. 각료들의 약한 결속력이 특징인 체제에서 군주의 종잡을 수 없는 개입, 모호한 민군 관계, 핵심 정치인들의 적대적인 경쟁으로 인해, 그리고 여기에 더해 안보 문제로 때때로 위기가 발생하고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비판적인 대중언론의 선동으로 인해, 이 기간 동안 국제관계의 불확실성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 p. 381.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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