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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25. 2024

보아야 할까, 읽어야 할까

발칙한 현대미술사 - 윌 곰퍼츠(알에이치코리아)  ●●●●●●●●○○




   <검은 사각형>은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말레비치의 의도는 복잡했다. 그는 설령 기존의 세계를 상징하는 모든 단서를 없앤다 하더라도, 관람자는 머릿속에서 그림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관람객들은 그림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이 작품 속에서 어떤 요소를 이해하겠는가? 그리하여 사람들은 흰색 배경 위에 검은 사각형이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로 어쩔 수 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의 의식적 심리 상태는 신호를 찾는 위성항법 장치처럼 절망스러운 순환에 갇히게 된다. 말레비치는 이렇듯 혼란이 지속되는 동안 내면 깊은 곳의 무의식이 마법을 부릴 기회가 생기기를 바랐다. 합리주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무의식을 통해 작가가 작은 사각형의 단순한 그림에 온 우주와 그 내부의 모든 생명을 나타냈음을 '볼' 수 있을 터였다. 

                                                                                                                                - p. 239. 러시아의 천재들




   . 15년 전 배낭을 메고 - 그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배낭여행은 진짜 배낭을 메고 가는 건 줄 알고 몸만한 배낭을 메고 다녔었다(^^;) - 첫 여행지인 런던에 도착해서 첫 날 갔었던 곳 중 하나가 테이트 모던이었다. 블로그의 여행기록에 보면 그 때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Ai Weiwei라는 작가가 해바라기 씨를 잔뜩 쌓아놓아 만든 설치미술 사진과 함께 '테이트 모던의 작품은 다 이런 식이었다. 어려워. 모르겠어. 피곤해(?)' 라는 글이 달려 있었다. 


   . 그도 그럴 게 비행기에서 내려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첫날에 오전에는 대영박물관을 보고, 낮에는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 저녁에야 들어간 곳이 테이트 모던이었으니까. 그렇잖아도 흙탕물을 한껏 빨아들인 솜뭉치처럼 녹초가 된 상태로 산더미처럼 쌓인 해바라기씨나 거리를 걸으며 시끄럽게 양철 양동이를 차는 사람의 영상을 보고 있으니 뭐가 와닿을래야 와닿을리가. 그저 이 사람들이 뭔가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건 미술이라기보다는 문학에, 그림이라기보다는 이야기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2010년, 중국의 예술가 아이웨이웨이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동굴 같은 터빈 홀을 도자기로 만든 해바라기씨 1억 개로 가득 채웠다. 그 역시 워홀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전체를 놓고 보자면 우울하고 음침한 풍경이지만, 씨를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전부 다른 모양으로 칠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은 중국인을 상징하는 한편, 그들이 함부로 유린해도 되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각자의 희망과 바람을 품은 개개인이 모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 p. 421. 상품이 된 예술



   . 그만큼 현대미술은 낯설다. 낯선 것뿐만 아니라 금전적 가치까지 더해지니(최근에는 NFT라는 것까지 생겨났나보다) 마뜩찮은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흔히 나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현대미술이란 위 사진에 올라와 있는 말레비치의 작품처럼 온통 흰 캔버스에 까만 사각형이 칠해져 있고, 아무 설명도 없으며, 아무 힌트도 없고, 제목조차도 '무'라던가 '검은 사각형' 같은 불친절한 이름이 붙어있다. 근데 심지어 그게 비싸다. 엄청나게 비싸다. 결국은 이거 그냥 자금세탁하는 도구 아닌가 하며 수상쩍은 가루를 보듯 멀어지는 게 보통이다. 


   . 윌 곰퍼츠 - 하필(?) 그 테이트 모던 관장 출신이다(!!) - 는 이런 나같은 아는 거 없이 의심많은 이들에게 어떻게든 저 까만 그림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540페이지를 할애해 인상주의부터 시작해 까만 사각형을 거쳐 해바라기 씨에 이르기까지 화가들과 작가들이 어떻게든 기존의 작품들을 디디고 올라서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나는 남들과 다르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역사를 보여준다. 아쉽게도 미술을 이야기하는 책에 도판이 너무나도 적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제외하면(그래서 책값이 생각보다 싸긴 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어떤 현대미술보다도 꼼꼼하고 그림과 작가에 대한 설명과 가십으로 가득 차 있으며, 무엇보다도 뜬구름 잡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서술된다. 덕분에 현대로 올수록 버거워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읽을 수는 있었으니. 그거면 됐지. 




   적어도 뒤샹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조각품을 만들어냈다고 자평했다. 우선 작가는 별다른 미학적 특징이 없는, 기존에 있는 대량생산품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그 제품을 본래의 기능적 역할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준다. 다시 말해,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을 붙여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배경지식을 뒤집음으로써 실질적인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뒤샹은 자신이 고안해낸 새로운 예술방식을 '레디메이드'라 일컬었다. 기성조각품이라는 뜻이다. 

                                                                                                 - p. 24. 뒤샹이 소변기에 머트라고 서명한 이유




   . 하지만 이 책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가졌던 생각이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사진의 등장으로 보여주는 미술이 직격탄을 맞고 그 대신 새로운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이 필수가 되면서 이제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메시지라는 것은 정말 '새롭다'기보다는 '개량'에 가까운 느낌에 불과해보인다. 그렇게 가면 갈수록 작가와 작품들이 쏟아지면서 마치 메뚜기떼처럼 와 - 하고 살짝 다른 것에 모여들고, 그러다 재미가 없어지면 다른 쪽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전형적인 소비 패턴이 이 분야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거기에 자본이 끼얹어지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강박으로 바뀐다. 더구나 책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뭔가 책을 읽고나면 메시지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메시지를 잘 들리는 곳까지 도달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인 것처럼 보이는 게.... 기껏 잘 읽어놓고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속이 꼬인걸까. :)




   사실상 말레비치는 예술가를 주술가로 바꿔놓았다. 또한 예술을 예술가가 설정한 규칙에 따르는 심리 게임으로 바꿔놓았다. 이제는 화가의 붓이나 조각가의 끌을 손에 쥔 사람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작가는 새로이 종속적이고 불리한 입장에 처한 관람객에게 감히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보라며 도발했다. 이런 상황은 오늘 날에도 여전하다. 추상예술은 우리 모두를 쉽게 속아넘어가는 바보처럼 만들고, 실제로 그곳에 없는 무언가를 믿게 하는 위험에 빠뜨린다. 아니면 당연히, 계시와도 같은 예술작품을 분별없이 무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믿을만한 용기가 없어서라고 몰아간다. 

                                                                                                                                - p. 243. 러시아의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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